Armytage Open Lecture
 

 

한국영어영문학회 목요강좌

2000 10 26일 오후 6시 미국공보원

 

정보시대의 문학연구                                                    

 

1.    정보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보화 정보사회에 대한 정의: 1980년대까지 우리사회의 변혁을 이끌어왔던 구호가 경제부흥과 민주화였다면, 1990년대를 거쳐 천년을 맞은 최근 10년간의 사회변화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집약된다. 한국사회에서 세계화(Globalization)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미국의 압도적인 패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적응이고, 이의 실패가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최근의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아프게 실감했다. 그러한 세계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계질서의 확립을 견인하는 것은 IBM 마이크로소프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보통신산업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통신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단순히 나라의 산업구조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문화부문을 포함한 사회조직 전체, 나아가서는 현재 도달한 인류의 문명 전체를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켰다는 주장을 등장시켰고, 이것이 이른바 "정보화(Informatization)"이며, 이것이 실현된 새로운 사회를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라고 부른다. 웹스터(Frank Webster) 요약에 따르면, 이러한 정보사회는 기술적으로는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으로 정보의 처리, 저장, 전송의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 경제적으로는 정보가 부의 일차적인 창조자가 되는 , 직업적으로는 정보관련 산업종사자가 여타 산업분야의 종사자들보다 많은 , 공간적으로는 정보통신망의 연계에 의해 지리적 거리가 극복되는 , 문화적으로는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뜻한다.

 

*정보화와 문학의 위기: 정보사회에서 문학이 받는 도전은 활자에 기반을 둔 문화적 전범 자체를 폐기하는 역사적 격변의 일부로 이해될 정도로 심각하고 근본적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문학의 위기는 전통적인 문학이 그 내용과 형식, 그 생산과 소비의 양식에 있어서 새로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정보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더 이상 유용하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인문학적 문학관이 전제하는 인간적 가치, 즉 인간만이 창조하고 인간만이 읽어낼 수 있는 문학적 진실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이거나, 존재한다 하더라도 어떤 특별한 개인(작가, 학자, 혹은 비평가)들의 정신적 능력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고도의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보고라는 문학의 전통적 자기정당화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물론 탈구조주의자들의 해체론도 이러한 논리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들 역시 문학활동 자체의 인간적 성격, 즉 인간이 문학활동의 주체라는 생각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2.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적 논리

 

*하이퍼텍스트의 정의: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하이퍼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포괄적인 용어인데, 이것은 컴퓨터가 만들어 낸 비선형적, 비순차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를 뜻하는 말로서 사반세기 전에 테드 넬슨(Ted Nelson)이라는 대중적인 컴퓨터전문가에 의해 고안되었다. 하이퍼텍스트는 인쇄된 텍스트와는 달리 텍스트의 단위들 간에 여러 개의 통로를 제공하는데, 이러한 단위들을 하이퍼텍스트가 나오기 이전의 인물이지만 선견지명을 가졌던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의 용어를 빌려  “렉시아(Lexia)”라고 부른다하이퍼텍스트는 인쇄된 텍스트의 고정되고 단일한 방향의 페이지 넘기기와는 대조적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렉시아의 그물망과 그것들 사이의 서로 다른 통로들로 이루어진 연계체계(networks)를 활용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기술을 구현한다. 이것은 상호작용적(interactive)이며 다성적(polyvocal)이고, 단정적인 발언보다 담론의 복수성(plurality)을 선호함으로써 독자를 저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이퍼텍스트의 독자와 저자는 말하자면 공동의 학습자이며 동시에 공동의 저자이다. 그들은 하이퍼텍스트의 문자적 (그리고 시각적, 활동적, 청각적) 요소들의 위치를 찾고, 또 다시 찾는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여행자이다. 우리가 저자라고 불러왔던 사람이 더 이상 그런 일들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Bolter 153, 재인용)

 

*하이퍼텍스트의 논리와 문학의 위기

 

이러한 하이퍼텍스트 지지자들에 의하면 하이퍼텍스트는 전통적인 인쇄된 책을 소멸시키거나 적어도 상당부분 대치할 것이고, 따라서 문학의 기본매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Nunberg 9-20). 그렇게 되면 문학의 형식과 내용도 하이퍼텍스트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 의미는 문학적 활동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독자에게 작품을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읽을 것을 요구하면서, 용의주도하게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고 그것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통제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매체의다성적성격은 저자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유기적인 구조에 기반한 단일한 의미를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이퍼텍스트는 가상공간에서 다른 텍스트와 언제나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정한 전통적 텍스트가 갖는 독점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소위 저자의 텍스트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 즉 저작권도 예전처럼 누릴 수 없거나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다(Delany and Landow 1993 16-18). 문학작품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하이퍼텍스트의 유동적 성격으로 인해 작품의 정본이라는 특권적 지위가 없어지고, 또한 정전이라는 정본들 간의 위계질서도 해체되며, 고전적 작품들만이 독점한 확정적이고 항구적이며 단일한 문학적 의미나 가치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문학연구자나 비평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학작품을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훈련받은 독자로서의 창의적인 능력, 즉 때로는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그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문학에 대한 감식력을 더 이상 발휘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에 대한 저자의 권한을 상당 부분 이양 받으면서, 문학작품의 의미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저자-독자관계의 근본적인 변화이기도 한데, 일견 독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면서 의미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확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학작품을 다른 문서나 다름없는 하나의 정보단위로 격하시키고 저자나 훈련받은 혹은 평범한 독자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정보처리자로 규정하는 것이 된다. 문학의 매체로서 하이퍼텍스트가 가질 수 있는 이러한 특성은 결국 문학활동을 더 이상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정보처리과정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귀결한다정보사회에서는 문학의 창작과 감상 모두가 인간적 개입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르고(Aarseth 29-141) 오늘날의 문학종사자들은 전통적인 인문주의자이든 해체주의자이든 누구라도 모두 실업자가 될 운명인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이론

 

전통적인 문학연구자에게 이러한 낭패감을 안겨줄 만큼 강력한 하이퍼텍스트론의 위세는 사실상 그것이 문학론으로서 갖는 설득력보다는 변화하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조건과 그에 입각한 문화적 환경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따라서 그러한 이론이 문학적 설득력을 얻어나가는 과정에는 기존의 문학론과의 협력이 필요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80년대 후반 이후 세력을 잃어가던 해체론과의 결합은 양쪽 모두에게 행복이었다. 하이퍼텍스트론의 가장 중요한 열성지지자인 랜도우(George Landow)는 프랑스 쪽의 바르뜨(Roland Barthes), 보들리아르(Jean Baudrillard), 심지어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s Guattari)  미국의 데리다(Jacque Derrida), 밀러(Hillis Miller)를 인용하며 하이퍼텍스트야말로 그들이 전통적인 책 문화에서 주장해 온 해체이론을 물질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하이퍼텍스트의 도래를 문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이미 그 작동구조에서부터 작가의 주체와 그것이 부과하는 작품의 의미의 중심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하이퍼텍스트 자체의 유동성과 가변성, 그리고 연계성 등은 의미가 기호들간의 순간적인 관계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원칙을 문자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 랜도우의 주장인 것이다(Landow, 1-48). 해체주의처럼 의미의 불가능성을 신봉하지 않는 전통적 이론 가운데에서도, 하이퍼텍스트가 선형적인 독서를 권장하지 않고 독자의 자의적인 일탈(digression)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텍스트와의 항상적인 관계성, 그리고 독자와의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에 기반을 둔 독자 중심의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독자반응이론(reader-response theory)을 하이퍼텍스트의  또 다른 이론적 기반으로 내세우기도 한다(Bolter 156-159). 이 이론과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을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컴퓨터가 독자의 다양한 반응을 모방(simulate)할 수 있고, 이것은 컴퓨터가 문학의 생산자뿐만 아니라 독자도 될 수 있고, 문학의 창작만큼이나 창의적이고 인간적 고유성을 가진 활동이라고 여겨지는 문학의 해석을 궁극적으로는 얼마든지 기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Miall, 1990-2, 323-339).

 

3.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한 문학연구와 교육

 

*문학의 정보화

 

하이퍼텍스트가 이렇게 기존 학계에서 이론적 근거를 얻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문학작품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창작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보시대의 변화에 비교적 적대적이지 않은 문학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전적 문학작품을 계속 연구하되, 그 방식에 정보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문학연구의 환경을 정보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은 기존의 고전적 텍스트들을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전자적 형태, 즉 기계가독형(machine readable form)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이 전자 텍스트로 바뀐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하이퍼텍스트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의 궁극적인 의미를 굳이 명확히 하지 않고도 그 사회적 효용, 예컨대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accessability)과 가용성(availability)을 명백하게 높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가장 먼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어차피 한정된 자원을 재정리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시적인 일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정당성은 전자텍스트의 활용에 따라 사후에 확인되는 측면이 있다. 가령 기존 텍스트의 전자화는 컴퓨터로 구현되는 상대적으로 풍족한 공간성에 힘입어 기존의 책 형태의 출판보다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으며, 책 출판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정전논의를 새로이 불러일으키며 탈권위적 탈정전적 출판의 원칙을 표방할 수 있었다.

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기계가독형 텍스트의 등장은 전자텍스트의 검색을 빠르고 간편하게 하여 기존의 문헌학적 분석을 좀더 큰 규모로 진행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동의어사전(concordance)을 전자적으로 구현한 OCP, WordCrucher, TACT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기존의 문체론적 분석(stylistic analysis)을 좀더 큰 규모로 정교하게 수행함으로써 성급한 사람은 벌써 컴퓨터비평(computer criticism)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비평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Delany and Landow, 293-318, 319-342; Smith, 339).  스타일분석이 극단화되면 한 작가의 성향을 완전히 분석하여, 그의 작품을 새로운 주제로 복제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고, 이것은 컴퓨터를 문학해석의 주체로 뿐만 아니라 그 생산의 주체로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계가독형 텍스트의 이러한 활용은 전통적인 문학연구 ―동의어 사전을 활용한 서지학적 스타일 분석―를 약간 더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 뿐이지 앞서 설명한 하이퍼텍스트의 문학론을 제대로 응용한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상 기존의 문학연구자들이 아무리 화해의 노력을 해도 하이퍼텍스트가 도입한 새로운 문학의 개념과 그 제도적 운용방식은 문학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작용 (우리가 문학적 상상력, 영감, 감수성이라고 불러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문학의 존재의의 자체를 불가피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령, 시드니(Philip Sidney)가 문학의 목적을 교화와 쾌락이라고 했을 때, 현대에 예전과 같은 도덕적 교화는 포기한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문학이 주는 쾌락(pleasure)에는 일정한 수준의 도덕적 경험, 적어도 컴퓨터게임보다는 정서적으로 유익한 경험이 결부되기 마련이고 그것에는 매우 간접적으로라도 교화적, 혹은 교육적 의미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하이퍼텍스트적 문학의 목적은 어쩌면 더 전면적으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쾌락의 교양적 의미는 최소화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문학을 정교하게 구성된 컴퓨터게임으로 간주하고, 이것이 주는 쾌락은 미학적 효과라기보다는 물리적 효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문학의 허구성을 극대화하여 그것의 현실연관성을 구조적으로 최소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러한반문학적본질을 고려해 볼 때, 전통적 문학작품을 재료로 만들어진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적 의의는 애당초 그리 클 수 없다.

 

*정보화된 문학교육? –David Miall의 경우

 

하이퍼텍스트를 문학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있어서 종래의 인쇄된 텍스트를 완전히 대치할 매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문학의 연구와 교육의 환경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기존의 문학연구자들 중 일부는 그러한 대세를 인정하고 새로운 매체의 논리를 기존의 문학론과 조응시키면서 전통적인 문학연구의 수행에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실현해 보려고 노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연구 자체에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작업들은 아직까지 초보적인 실험단계이며 최근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져온 전통적 문학작품들의 전자화 작업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분야의 빈곤한 성과로 인해 전자 텍스트의 사회적 활용은 아리러니하게도 하이퍼텍스트의 문학관이 별로 장려하지 않을 것 같은 문학의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집중되고 있다국내외를 막론하고 축소의 압력을 받고있는 대학의 문학부는 앞다투어 싸이버 수업(Cyber Class)의 하부구조를 구축함으로써(이른바 교육정보화) 정보사회에서의 스스로의 유용성(혹은 적응능력)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으며, 전자화된 텍스트의 데이타베이스는 그 하부구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마이얼의  Romanticism: The CD-Rom은 하이퍼텍스트의교육적활용의 성과를 가늠하는데 편리한 척도가 된다. 왜냐하면 마이얼은 고전적 문헌의 새로운 집대성 작업(Duncan Wu의 새로운 낭만주의 선집)을 기본으로 하여 그것에 관련 자료들을 연결시킨 교육용 하이퍼텍스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이얼이 최근에 발표한 글에서 소개한 그의 실제 경험은 탈의미론적 정보의 처리기술에 입각한 하이퍼텍스트적 논리를 전통적 문학교육(혹은 문학적 이해)와 화해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언해준다(Miall 1999).

사실 마이얼은 낭만주의 연구의정보화에 누구보다 앞장서면서도 문학적 해석의 인간적 성격을 강조하는 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문학연구의 핵심적 경험은 컴퓨터에 의해 촉진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컴퓨터를 이용한 읽기가 그렇게 인간에게 고유한 독자들의 독서경험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첫번째 읽기(reading)를 대신하거나 모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같은 독자가 정서적인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분석을 위한 두번째 읽기(re-reading)를 하는 과정에만 컴퓨터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Miall 1990-1, 49-59). 마이얼이 최근 논문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랜도우 같은 선구적인 이론가가 문학적 읽기의 본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잘못된 비판을 받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고안한 것 같은 하이퍼텍스트의 문학교육적 의미가 퇴색된 바,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이퍼텍스트가 학생들에게 그러한 문학적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가를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마이얼이 워즈워스의 『서곡』의 6권에 나오는 유명한심플론 고개(Simplon Pass)” 일화를 예로 든다. 잘 알려진 대로 알프스의 정상을 자기도 모르게 지나버린 워즈워스가 느닷없이 인간의 상상력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되는 이 난해한 일화에서 마이얼이 읽어내는 것은 시인이 자연을 자기 나름으로읽으려는노력이 좌절되면서 인식하게 되는 이른바변혁적 경험(transforming experience)”이다.

 

이 귀절이 읽히는 것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의견을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워즈워스 자신처럼 하나의 경험을 기대하고 갔다가 다른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도식에 집착하지만, 그것이 체계적으로 좌절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귀절에서 워즈워스는 패배에서 승리를 창조하며 그의 실망을 분명하게 극복한다. 한마디로, 이 귀절은 우리에게 변혁적 경험을 제시한다그러나 그 경험은 풍경시에 나오는 통상적인 장소와도 맞지 않고, 우리가 자서전적 화자에게 기대하는 설명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귀절은 풍경시의 묘사의 관행이나 여행기의 관습을 모두 뛰어넘는다. 워즈워스는아비없는상상력 혹은서로를 방해하는 바람의 광경에 의해 어떤 깨달음이 얻어질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독자인 우리에게 일종의 귀납적 비약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시인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인이 지나친 눈에 보이는 그 지역을 넘어서도록 만든다.

 

마이얼이 여기에서 독자로서 보여주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탈구조주의자의 그것인데, 시인과 자연과의 접촉에서 획득하는변혁적 경험을 얘기하면서도, 그 내용을 묻지 않고, 그것을 자신이 주장하는 이른바문학적 읽기라는 인식론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얼이 생각하는문학적 읽기는 단순히 정보의 획득과 처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독자의변혁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러한변혁의 경험은 독자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문학적 읽기를 촉진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교육적 유용성을 입증하는 대목이라는 것이 마이얼의 주장이다. 그러나 마이얼 자신이 곧바로 인정하듯 독자의 능동적 개입을 요구하는 것은 꼭 하이퍼텍스트 만의 요구는 아니며, 독자의귀납적 비약이 시인의변혁의 내용을 묻지 않고 독자 나름으로 그 내용을 채워 넣어 경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그러한비약의 출발점이 딱히 문학작품일 필요도 없고, 워즈워스일 필요는 더 더욱 없다.

마이얼이 뒤이어 제시하는 실제 교육의 임상경험은 그가 생각하는 하이퍼텍스트적 문학교육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그가 자신의 Romanticism: The CD-Rom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몽블랑(Mon Blanc)에 대한 집단활동을 시킨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이 나름대로변혁의 경험을 직접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각종 멀티미디어 자료를 활용하여 읽어낸 것은 마이얼이 워즈워스에서 얻어낸 것과 똑같이 몽블랑에도변혁적 힘이 있으며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라는 것인데, 활동에 참여했던 한 학생의 경우 그변혁적 힘의 효과는암벽타기에 대한 욕망과 흥미를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었다. 마이얼 자신은 이러한예기치 않은낭만주의 문학의 교육적 효과에 대하여 오히려 흡족해하면서 이것을 하이퍼텍스트적 독자중심의 읽기의 바람직한 예로 들고 있지만, 이것을 낭만주의시의 독서경험이 가지는 바람직한 교육적 효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나의 경험: 2000 1학기 낭만주의 영시- Romanticism The CD ROM과 각종 비디오 자료를 활용하였으나, 학생들은 예상외로 기성품으로 만들어진 정보를 제시하는 것보다 텍스트에 대한 교수의 해설을 더 중시하였다. 문학작품을 읽는데 있어서는 텍스트 이외의 풍성한 정보의 존재가 오히려 작품 자체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측면이 있었고, 그림이나 동영상의 경우도 작품의 말이 주는 풍성한 울림을 축소시키는 느낌이 있었다.

 

2000 2학기에는 영국의 역사와 사회- 비문학적 강의에서는 정보를 풍성하고 체계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특히 각종 웹사이트(영국정부의 공식 사이트, BBC 사이트, 각종 언론매체 사이트, Britannica 사이트등)이 가장 최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서 강의록을 HTML로 작성하여 사용하니까 대단히 편리한 면이 있다. 비문학적 강의에서는 미리 정해진 내용을 전달하는 식의 강의가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함께 탐색하고 선별하고 조직하는 동료여행자의 역할을 실행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단지 이것이 그대로 문학교육에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의 여지가 많다.

 

4.  정보화는 문학연구의 적인가 동지인가?

 

문학과 정보화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늘 떠나지 않았던 불길한 생각은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정보화가 가져온 몇 가지의 편리성에 현혹되어 문학의 대의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고, 다른 문학연구자, 특히 여전히 워드프로세서 조차 부담스러워 하시는 선배 교수들의 착잡한 시선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정보화에 대하여 문학연구자들이 느끼는 적대감과 불안감은 19세기 초 러다이트의 그것과 비견될 수 있는데, 정보화가 가져온 혹은 앞으로 가져올 여러가지 변화들을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라며 지나치게 열광하거나, 문학의 죽음의 전주곡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비관하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데, 본인이 볼 때 문학의 정보화가 약속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아직 가능성일 뿐이며, 문학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할 만큼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문학연구에 관한 한 정보화가 가져온 실제적인 변화는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단계로 진행되었다기보다는 기존의 연구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가장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텍스트의 전자화 작업만 하더라도, 그것이 텍스트를 기계가독형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자료에 대한 단순히 접근성을 높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문학사에서 갖는 상대적 가치를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고(canon revision), 또 책출판의 경우보다 저자의 손길을 더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가령, 워즈워스의 경우, 워즈워스가 자신의 작품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생각하여 자기 나름의 원칙대로 개별 시편들을 모음집으로 펴낸 것워즈워스의 시는 그의 지속적인 퇴고와 교정작업으로 인해 다수의 정본이 존재한다는 것 등, 워즈워스가 자신의 시를 창작하고, 출판하고, 교정하고,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들은 그가 자신의 모든 창작물들을 긴밀하게연결하여 거대한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체계화하려는 하이퍼텍스트 저자의 충동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따라서 워즈워스의 시를 하이퍼텍스트의 형태로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보다 입체적으로 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 가령 코넬판 워즈워스 정본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충실하게 그러한 충동에 접근하는 것일 수 있다가령, 『폐가』라는 시에 접근할 때, 그것이 하나의 텍스트로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다 보여준다든지, 서정담시집의 조직원칙과 시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좀더 명백하게 한다든지, 혹은 여러 판본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실어서 연결시켜놓는다든지 하는 것을 통해서 전통적인 책에서 긴 각주나 부록, 평행텍스트(parallel text) 등의 장치로 불완전하게 재생해 놓은 워즈워스 시의 원형을 보다 효과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장기적인 전망을 해본다고 했을 때, 정보화가 기존의 문학연구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유지시킬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국의 학술원 회장을 지낸 옥스포드대학 철학교수이자 영국학술원의 회장이었던 앤소니 케니(Anthony Kenny) 1992년에 행한 연설에서, 인문학 연구가 이용하고 있는 컴퓨터기술의 양과 수준이 놀랄 정도로 커지고 높아졌음을 지적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인문학 정보화로 인해 연구인력과 연구내용들 많은 부분이 도태되고, 연구의 관심이 문헌연구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소프트웨어 연구 개발로 전환될 예측한 있다. 이러한 전망을 문학 분야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학연구 역시 이러한 정보화의 대세에서 자유로우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정보화로 인한 문학의 탈신비화가 피할 없는 대세라면 그것이 탈가치화, 탈인간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문학연구자들의 몫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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