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안녕하세요. 저는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있는 박찬길입니다. 저는 이성원선생님께서 부임하셨던 1983년에 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첫 학부강의인 “르네쌍스영시”를 수강했고,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오랜 가르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 석사과정에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썼던 워즈워스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거기까지이지만, 이후 다른 곳에서 이어진 박사과정에서도 여전히 선생님과 여기에서 배운 워즈워스를 계속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영시를 가르치고 있으니까, 선생님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아오고 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긴 인연과 오랜 가르침을 생각하면, 지금쯤 훨씬 좋은 워즈워스 학자가 되어있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해, 이제 퇴임을 앞두고 계신 선생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 앞으로 열심히 해서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워즈워스와 인간의 고통”입니다. “인간의 고통”(human suffering)은 워즈워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입니다. 영화 “초원의 빛”으로 유명해진 “송가, 영원성에 대한 암시”(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의 말미에서 워즈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177-186)

 

풀잎에 광채가, 꽃에 영광이 깃들었던 그 시간을

이젠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에서

힘을 얻는다.

한때 있었던, 그래서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기본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위로를 주는 생각들에서.

철학적 정신이 나타날 때가 꼭 오리라는

죽음을 꿰뚫어 보는 신념에서.

 

나탈리 우드(Natalie Wood)는 이 대목을 낭송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첫 사랑의 파탄을 직감하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학자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 대목은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위로를 주는 생각들”(the soothing thoughts)이라는 귀절입니다. “위로를 주는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도 물론 문제였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생각들”이 다름 아닌 “인간의 고통”(human suffering)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그 “고통”의 주체가 자기 자기 자신이라면 모를까 만일 그것이 “남”의 고통이라면, 여기에서 도덕적인 고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정하여, 그 고통을 줄여주기 위하여 힘닿는 대로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거기에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야비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고통”에서 시작되어 “위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시를 창작하고 그것을 독자가 읽어내는 문학의 창작과 수용이라는 예술적 과정에 전체에 대한 설명이라 하더라도, 그 예술행위는 근본적으로 착취적 성격을 가졌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인을 “사람에게 말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했고, “자연에 대한 사람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던 워즈워스라면 그러한 주장이 더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성원선생님은 1984년에 발표한 “워즈워스시에서의 민중의 존재”(Presence of the People in Wordsworth's Poetry)라는 시에서 “쏠즈브리 평원 시편”의 세 가지 판본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워즈워스의 입장이 고드윈적인 사회적 비판에서 점차 내면적이고 종교적 해법을 구하는 방향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신 바 있습니다.

 

워즈워스의 장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민중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류의 슬픈 노래”(the sad music of humanity)를 듣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그건 너무 슬픈 노래였다. 왜냐하면 워즈워스가 변함없이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민중을 편드는 것은 단순한 감상(sentimentality)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워즈워스는 감성적으로는 민중과 함께 하지만, 사회적 문제에서는 지극히 무력하다. 이것은 그의 사상의 양면성이며, 그 효과는 극도의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러니는 민중을 “위한” 모든 문학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것일지 모른다.

 

한 버려진 여인의 슬픈 사연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워즈워스의 변화를 워즈워스의 보수화라든가 내면화라는 식으로 손쉽게 단정하기 보다는 워즈워스가 민중시인으로서 가졌던 당대에 가졌던 상대적인 선진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도덕적 딜레마를 워즈워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문학 전체가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미학적 문제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워즈워스 자신이 민중에 대한 “공감”과 “동정”의 문제를 단지 아이러니의 계기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시적 사유의 보다 본질적인 요인으로 간주했다는 데 있습니다. 워즈워스는 “쏠즈브리 평원 시편”의 여주인공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너진 오두막”(The Ruined Cottage)의 마가렛(Margaret)을 만들어냅니다. “무너진 오두막” 역시 “쏠즈브리 평원 시편”만큼이나 원고의 형태로 여러번 개작되어 결국 1814년에 “유람”(The Excursion)의 1권으로 출판됩니다. 그런데 “무너진 오두막”의 복잡한 개작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이 시에서 드러나는 워즈워스의 예술적 관심이 “쏠즈브리 평원 시편” 처럼 당대의 고통받는 민중의 전형으로서 “버려진 여인”이라는 관습화된 인물을 묘사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러한 인물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도덕적인 딜레마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인물들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공감과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동정심의 문학적 표현이 도덕적으로 건전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유의미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가렛 이야기의 화자로 기능하는 행상인(the pedlar)은 고통 받는 민중을 문학적 인물로 묘사할 때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 지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죽은 사람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헛된 장난을 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고통에서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선과 무관하게,

이성과도 관련 없이 단지 일시적인 쾌락만 얻어내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지각없는 행동이고, 엄정한 질책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슬픈 사유 속에서 미덕과 친밀한 어떤 힘이 종종 발견되고,

언제나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들 속의 몽상가,

정말이지 안일한 몽상가일 뿐이다.

 

“It were a wantonness and would demand

Severe reproof, if we were men whose hearts

Could hold vain dalliance with the misery

Even of the dead, contented thence to draw

A momentary pleasure never markedBy reason, barren of all future good.

But we have known that there is often found,

In mournful thoughts, and always might be found,

A power to virtue friendly; were't not so,

I am a dreamer among men, indeed

An idle dreamer."(221-231)

 

워즈워스는 이 대목에서 (다른) 인간의 고통을 문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진 도덕적 딜레마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들에 대한 공감, 즉 “슬픈 사유”는 반드시 어떤 도덕적 선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 워즈워스가 생각하는 “공감”은 단지 슬픔과 연관된 감정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명상적 마음에 슬그머니 들어와 사유와 함께 자라나는”(79-82) 조금 특별한 종류의 정신적 활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활동이 “반드시” 어떤 도덕적 선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상인”은 이러한 예술적 지침에 입각하여 마가렛의 이야기에 도덕적으로 온당하게 공감하는 법을 보여줍니다. “무너진 오두막”에는 “행상인”에게 마가렛의 얘기를 듣는 청자의 역할을 하는 “젊은 시인”이 이 시 전체의 화자로 등장하는데, 그는 다른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보편적인 방식을 예시합니다. 그는 마가렛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비탄의 무기력감 속에 일종의 형제애로서 그녀를 축복”하는 것으로 스스로 느낀 저릿한 슬픔의 고통을 위로하려고 합니다. 사실, 타인의 고통스런 삶의 이야기에 대하여 이것 이상으로 선하게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남의 얘기이지만 공감의 폭이 컸기 때문에 자신에게 “무기력감”을 가져올 정도였고, 그녀를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같은 시대를 산 동료인간으로서의 “형제애”를 느꼈으며, 그런 상황에서 이미 죽은 그녀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도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축복”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했다는 것은 그가 통상적인 엘레지의 문법에 충실하게 반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상인은 그의 공감과 슬픔을 꾸짖으며, 그녀의 슬픈 사연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방식을 제시합니다.

 

“친구여, 그대의 슬픔은 그것으로 족하다.지혜는 더 이상의 슬픔을 원하지 않는다.지혜롭게, 명랑함을 되찾고, 더 이상

가치없는 눈으로 사물의 형태를 읽지 말라.나는 바로 저 잔털들과, 저 잡풀들,

저 담 위로 높이 웃자란 새싹들을 잘 기억한다.그 위엔 물안개와 빗물들이 조용히 맺혀 있었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그것들은 내 마음속으로너무나 조용한 고요함의 심상을 전해주었다.그것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어지러운 생각들 가운데차분하고 조용하게 자리 잡았고,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파괴와 변화에서 느끼는 슬픔과 실망이,

그리고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 존재의 외형이 남겨놓는 그 모든 비탄의 심경이

모두 한갓 안일한 꿈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사유가 있는 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꿈이었다.

나는 몸을 돌렸고, 행복하게 길을 떠났다.”

 

“My friend, enough to sorrow have you given,

The purposes of wisdom ask no more;

Be wise and chearful, and no longer read

The forms of things with an unworthy eye.

She sleeps in the calm earth, and peace is here.

I well remember that those very plumes,

Those weeds, and the high spear-grass on that wall,

By mist and silent rain-drops silver'd o'er,

As once I passed did to my heart convery

So still an image of tranquillity,

So calm and still, and looked so beautiful

Amid the uneasy thoughts which filled my mind,

That what we feel of sorrow and despair

From ruin and from change, and all the grief

The passing shews of being leave behind,

Appeared an idle dream that could not live

Where meditation was. I turned away

And walked along my road in happiness.(508-525)

 

“행상인”이 생각하는 “도덕적 공감”의 방식을 냉정하게 말한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인식이 일종의 철학적 사유와 결합하여 타인의 고통에 대한 통상적인 인간적 공감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효화는 매우 강력하게 실행되어 그 결과는 심지어 행상인의 “행복감”으로까지 이어질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슬픈 사유 속에서” 자라난 “미덕과 친밀한 어떤 힘”이요, 워즈워스가 생각하는 “도덕적 공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물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누가 봐도 “젊은 시인”의 공감의 방식이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행상인”의 “도덕적 공감”이 마가렛의 고통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을 배제한 것이라면, 그 공감은 도대체 누구와의 “공감”이라는 말입니까? 또 그러한 공감이 결국 “행상인” 자신의 “행복감”으로만 연결된다면 그러한 공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무너진 오두막”의 “도덕적 결말”은 후대의 학자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워즈워스의 시적 수사를 예술적으로 수용한다고 해도, “슬픈 사유”의 주체가 워즈워스의 미학적 사고방식(mindset)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한, 그러한 사유의 결과 얻어지는 도덕적 힘 역시 사유의 주체에게만 발휘되는 것인 한, 보통의 독자들로서는 워즈워스적인 “도덕적 공감”의 도덕성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런 어려움은 워즈워스 자신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의 섭리를 대신하는 자연의 섭리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했고, 그래서 도입한 것이 One Life philosophy였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오두막”의 맥락에서 당장 필요했던 것은 그러한 내용으로 “슬픈 사유”를 보다 견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보다 책임감 있는 주체였습니다. “행상인”의 성장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삽입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고, 바로 이것이 그의 평생에 걸친 자서전 프로젝트,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는 철학시 프로젝트의 출발이었습니다. 워즈워스는 “행상인”의 도덕적 비젼에 철학적 무게를 실음으로써 결국 “인간의 고통”이 진정으로 “위로”를 가져다주는 보편적인 도덕적 공감의 방식을 완성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앞에 인용한 글에서 워즈워스 사상의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지적하시면서도 그가 들려줬던 “인생이라는 슬픈 음악”에 공감하고, 그가 제안하는 “위로”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워즈워스의 인간애를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의 시가 아름다웠고, 또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당시에 그 정도했던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맥간(Jerome McGann)은 워즈워스의 노력을 “부르죠아의 환상”으로 일축했지만, 저는 그의 시를 당대의 맥락에서 좀더 자세히 읽고, 그의 시를 역사화하면서도 그의 휴머니즘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박사논문이 그렇게 하려고 했고, 학위를 마친 다음의 변변히 않은 몇 편이 글들도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사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지금까지의 제 공부는 결국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를 하나 하나 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워즈워스에게 혁명은 무엇이었는지, 서정담시집에서 서정시와 담시는 어떻게 만나는지, 워즈워스에게 자서전은 또 무슨 의미였는지, 그에게 영국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또 영문학의 전통에서 워즈워스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물론 아직도 숙제를 다 하려면 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50대 중반이면 이제 공부는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를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제 교단을 물러나시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건재하셔셔, 계속 숙제검사를 해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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