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정보화시대, 인문학의 진로와 과제

 

 

 

1. 정보화와 인문학의 위기

 

1980년대까지 우리사회의 변혁을 이끌어왔던 구호가 경제부흥과 민주화였다면, 1990년대를 거쳐 새 천년을 맞은 최근 10년간의 사회변화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집약된다. 한국사회에서 세계화(Globalization)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미국의 압도적인 패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적응이고, 이의 실패가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최근의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아프게 실감했다. 그러한 세계화,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계질서의 확립을 견인하는 것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보통신산업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통신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단순히 한 나라의 산업구조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문화부문을 포함한 사회조직 전체, 나아가서는 현재 도달한 인류의 문명 전체를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켰다는 주장을 등장시켰고, 이것이 이른바 "정보화(Informatization)"이며, 이것이 실현된 새로운 사회를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라고 부른다. 웹스터(Frank Webster)의 요약에 따르면, 이러한 정보사회는 기술적으로는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으로 정보의 처리, 저장, 전송의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 경제적으로는 정보가 부의 일차적인 창조자가 되는 것, 직업적으로는 정보관련 산업종사자가 여타 산업분야의 종사자들보다 많은 것, 공간적으로는 정보통신망의 연계에 의해 지리적 거리가 극복되는 것, 문화적으로는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회의 도래가 전례없는 풍요와 행복을 가져올지 아니면 새로운 억압과 박탈을 의미할지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가지는 “정보화”에 대한 실감은 쉴러를 비롯한 비관론자들의 말대로 사회적 감시의 심화와 소비자 자본주의의 강화 쪽에 가깝다. 즉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경험되는 정보화의 실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질서 안에서 한층 더 강화된 자본주의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뜻하며, 경쟁력의 강화와 이윤의 극대화는 정보화를 표방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는 개혁의 원인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정보화는 인문학의 연구와 교육을 위한 사회적 환경도 급격하게 바꾸고 있으며, 인문학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발전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위협으로 느끼고 이를“인문학의 위기”라고 불러왔다. 인문학 위기론은 사실상 정보화로 인해 새삼스럽게 불러 일으켜진 논의는 아니지만, 정보화가 진척됨에 따라 인문학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위기의식이 한층 절박해 진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진단하는 인문학 위기의 원인은 다양하다. "인문학“의 본질상 근본적인 ”위기“는 생길수 없다는 입장에서부터, 그 반대로 “의심의 해석학”으로서의 인문학의 이념에 그 위기의 기원이 내재되어 있다는 입장 자본주의의 세계체제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 한국 인문학의 위기를 동양의 인문적 학풍에 대한 서구의 학문적 전통의 문화식민지적 침략에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 등 다양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인문학자들이 활동하는 대학의 인문학부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인문학 관련학과에 더 이상 지원하지 않고, 대학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맞추어 대학의 조직을 개혁하려고 하며 이것은 곧 인문학 전공교수의 직업적 불안정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정보화의 물결속에서 인문학자들이 실감하는 위기는 그 본질과 원인이 어디에 있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1990년에 이미 “문학의 죽음”을 선언했던 커넌(Alvin Kernan)은 최근에 『인문학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라는 책을 엮어내며 그 서문에서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며 미국의 인문학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저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수백년의 인문학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쪽의 상황도 한국이나 미국과 다를 바 없는데, 영국의 영문학자가 솔직하게 토로하는 직업적 곤경은 정보화사회에 인문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곤혹감을 대변해 준다.

 

교수직은 르네쌍스 시대의 궁정인의 처지와 비슷하게 되었다. '직업의 안정성'이 없고, 자금도 별로 없고 그나마 가끔씩 주어지는 것도 1회성일 뿐이다. 대학체제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문학부도 이미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자기의 영역을 정당화해야 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연구과제를 수행하려면 전부 다 연구비를 신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연구성과 자체의 가치, 연구자와 연구자가 속한 과, 학부, 대학의 가치로 평가 받게 되어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가치에 대한 일반원칙들이 그대로 수용되고 그 연구자들이 그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문학부 소속의 교수들이 숙련된 신청서작성자로, 연구비수혜과제의 운영자로, 매끄러운 대외관계문헌의 생산자로 변한 것이야말로 1980년대의 인문학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다. 축소와 격변의 시기에 다가온 이러한 종류의 대학개혁은 연구의 질과 연구자의 사기 그리고 상상력 풍부한 정신과 미래지향적 기획에 타격을 주었고, 이것은 개혁이 가져올 지 모르는 이득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인문학부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이 느끼는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가 그러한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논리에 의해 불가피하게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이 진리의 탐구수단으로서 다른 학문적 전통으로부터 받아온 도전이 단순히 강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가령, 17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에서 그리스의 형이상학 대신 자연철학을 모든 학문의 기본으로 설정한 이래 인문학은 자연과학으로부터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정보사회에서 인문학이 받는 압력, 가령 인문학은 더 이상 삶을 위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비판이 이러한 자연과학의 전통적인 공격과 원리적으로 다른가? 또한 교육수단으로서의 인문학의 논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의 물리적 표현이자 전달수단인 고전적 문헌의 교화력은 정보사회의 소위 멀티미디어의 영향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위축되었는가? 이것은 정보사회를 산업사회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로 보느냐 아니면 그 연장으로 보는냐의 논쟁과도 깊이 관련되어있는 문제이다. 만일 정보사회를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로 파악할 경우에는 오늘날 인문학이 직면한 도전을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원칙에 입각한 근본적인 위기로 파악할 소지가 더 크다. 가령, 정보화 사회는 산업사회의 문화적 기반이었던 구텐베르크의 활자문명에서 벗어나 하이퍼텍스트에 입각한 사이버문화로 진전되었으며 인문학은 인쇄된 활자가 체현하고 있는 고정된 진리에 입각해 있으므로 유동성과 개방성을 그 본질로 하는 하이퍼텍스트가 활자를 대치한 정보시대에는 종래의 인문학이 진리의 탐구수단이나 인성의 형성수단으로서 원천적으로 용도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문학은 “진정한 학문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는 식의 고답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정보화사회의 구조조정에 순순히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정보사회는 후기산업사회의 한 변형으로서 정보화의 과정을 여전히 거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으로 파악한다면, 인문학에 대한 작금의 위협을 과학주의자들의 공리주의적 비판의 한 형태로 규정할 수 있고, 인문학은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스스로의 위상이나 인성의 형성수단으로서의 말과 글의 효능에 대하여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대신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서 그 전통적인 역할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실천적인 방안을 모색하면 될 것이다. 정보화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현상이고 그 본질을 현단계에서 최종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정보화가 설령 비문자적 매체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범주의 문화를 일반화시킨다고 해도 그것이 활자문화에 입각한 인문적 지식과 그에 입각한 교육의 가치를 완전히 소멸시킨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한국의 인문학위기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최종욱교수의 지적대로 최근의 인문학위기론은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인문학이 실제로 당면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 근본적 속성을 너무나 과장하여 실용적인 대처방안의 수립을 현실적으로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인문학위기론을 책으로 펴낸 플럼(J.H. Plum)은 고도화된 산업사회로부터 변화에 압력에 직면한 인문학자들이 대응하는 방식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권고한 바 있다.

 

과학적이고 산업적인 사회들의 등장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의 충격과 더불어 사회를 이끌어가거나 가르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자신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자신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확신을 잃은 인문학의 수행자들은 절박한 나머지 두가지 방식으로 도피해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적 방식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기능이 과거와 같으며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만 한다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믿는 척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세계로 칩거하여 그들의 주제에 어떠한 사회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자들은 이제 그들의 존재를 위협받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현재 견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바꾸어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의 요구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는 수 밖에 없다.

 

플럼이 지적하는 인문학자들의 위선적 태도는 실제로 인문학의 성향을 더욱 비실용적으로, 더욱 반사회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본질이 무엇이든 정보사회로의 진전이 현단계에서 불가피하고, 그러한 변화의 와중에 경험하는 인문학의 위기가 실제적인 것이라면, 그러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 보다 필요한 일은 인문학의 위기를 하나의 초월적 개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근거없는 낙관론이나 무책임한 비관론에 안주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그 의미를 정보사회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2. 전통인문학의 이념과 정보사회의 논리

 

인문학(the Humanities)에 대한 현재적 이념의 기원 중 가장 오랜 것은 그리스어 paideia(교육 혹은 학습)로서 그 목적은 기원전 5세기 중반의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도시국가의 건전한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체조, 문법, 수사학, 음악, 수학, 지리학, 자연철학, 철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에 상응하는 라틴어는 humanitas(인간의 본성)로서 기원전 55년 키케로(Cicero)가 쓴 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쓰였으며 웅변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웅변가는 단지 웅변을 위한 언어적 기술만을 습득한 자가 아니라 실천적 지성을 갖춘 일종의 종합적 지식인 겸 철학자였다.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수다스런 바보보다는 현명한 벙어리를 택하겠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자를 원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박식한 웅변가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철학자라고 한다면 (철학자냐 웅변가냐 하는) 논쟁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반대로 철학자와 웅변가를 구분한다면 철학자는 웅변가보다 열등하다. 왜냐하면 완벽한 웅변가는 철학자의 모든 학문을 갖추고 있지만, 철학자들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언변을 가지지 못했고, 그들이 그런 능력을 아무리 무시한다 해도 그들의 지식에 그것을 보태야만 최고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버드(Bird)의 설명에 의하면 키케로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철학적 사고가 사회적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감성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그 실용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철학에 언어적 표현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종합적이고 실천적 지성을 지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 인간성의 소유자들은 공무를 담당한 위원회에서 활약할 권위있는 인물, 정부의 지도자, 원로원뿐만 아니라 대중집회, 공공행사에서 활동하기에 적합한 사고와 언변을 통달한 인물들로서 폴리스의 정치와 법을 이끌어 갈 시민적 지도자였다. 문제는 그가 웅변술이라는 언어적 표현력에 의해서만 철학의 실용성과 지성의 실천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키케로가 언어의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특성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질 Humanitas의 핵심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나 비슷한 주장을 한 퀸틸리안(Quintilian)에게 있어서 웅변술이라는 언어적 표현력은 교육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Humanitas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인에게는 외국어이자 고전어인 희랍어야말로 과거의 찬란한 그리스 문화를 체화하고 있는 유식한 언어로서 그들이 교육하고자 하는 Humanitas의 이상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랍어를 익히는 언어적 훈련은 단순히 기계적인 훈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상적 인간성 교육의 내용이었다. 브리테니카 사전은 로마시대 Humanitas의 이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후마니타스”는 모든 형태의 인간적 미덕을 최대한으로 함양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 용어는 그 현대어 표현인 인간성(Humanity)과 연관되는 이해심, 자비심, 공감, 동정 등뿐만 아니라 강인함, 판단력, 분별력, 언변, 심지어 명예심과 같은 적극적인 특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후마니타스”의 소유자는 조용히 은둔한 철학자나 지식인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활동적인 삶에 참여하는 자였다. 지혜없는 행동이 맹목적이고 야만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행동없는 지혜도 비생산적이고 불완전하다고 여겨졌다. “후마니타스”는 행동과 명상간의 적당한 균형을 요구했고, 그 균형은 타협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로마시대에 확립된 인문학의 이념은 애초부터 이러한 이상적인 인간성의 양성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은 하나의 전문적 기량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러한 종합적 능력을 가장 잘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의 핵심은 희랍어 고전을 통하여 말과 글을 익히는 것, 즉 현대적 의미의 문학적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인문학의 효용에 대한 후대의 논란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의 인문학이 이상적인 시민의 양성이라는 실천적 목적에 봉사하면서 동시에 희랍고전을 통한 말과 글의 훈련을 그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로마의 인문학, Humanitas는 보편적인 진리의 체현으로서의 희랍어에 대한 믿음, 즉 희랍어가 보편타당한 지식을 그 자체로 체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식을 실천하게끔 유도하는 도덕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사회에 이러한 “후마니타스”이 이상이 여전히 필요한지, 또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존립가능한 것인지를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이상에 내재된 몇 가지 전제들을 정보사회의 논리에 비추어 몇 가지 예비적인 논의를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가령, 보편타당한 진리의 보고로서 희랍문화가 가진 가치, 그리고 그에 입각하여 구성한 이상적 인간성은 현대의 정보사회에서는 당연히 통용되기 어렵다.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19세기이래 해체된 지 오래되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의 데카르트적 인식주체에 대한 공격은 그 윤리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일정한 인간성을 확정짓는 일 마저 어렵게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백인 남성 중심적인 인간이해에 대한 공격도 희랍적 의미의 인간교육은 원천적으로 어렵게 되어있다. 언어를 인간의 고유한 사고력의 매체로서 가장 인간적 특성으로 파악하고, 언어적 훈련이 인간성의 함양이고 실현이라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그 유효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정보사회에서 사고의 기본적인 매체로서 언어가 갖는 효용은 어디까지나 그 기능적 성격에 국한되며 가독력(literacy)이란 보다 높은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정보처리능력의 한 종류로 간주된다. 그러한 면에서 언어적 능력은 컴퓨터가독력(computer literacy)과 범주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인간의 가독력과 컴퓨터가독력을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과 글을 인간성의 고유한 표현으로 보는 전통적 인문학의 전제를 위협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간적 특성의 구현으로서 언어에 대한 로마 인문학의 믿음이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교화력--이것은 희랍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의 구현으로서의 언어 자체가 가진 교화적 기능에 대한 믿음이 합쳐진 것인데--에까지 이르면, 오늘날의 정보사회와의 공존가능성은 더욱 더 줄어든다. 이것은 희랍어의 강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지식"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인데, 이러한 지식은 가령 자연철학이 가져다주는 자연에 대한 사실적 지식과는 전혀 다른 도덕적 권위를 가지며, 이것은 이 당시 인문학에는 "지식"공간 안에 엄격한 도덕적 위계질서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정보사회에서는 “지식”을 다소 복잡한 형태의 “정보”로 격하하거나 거의 구별없이 사용함으로서 인문학적 “지식”의 도덕적 권위를 원천적으로 부인한다. 사실상 정보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패권에도 불구하고 정보사회의 반권위적, 우상파괴적 정치학의 궁극적인 근거는 가치지향적이고, 독점적이고, 위계적인 인문학적 지식을 대신하는 가치중립적이고, 개방적이며, 민주적인 ‘정보’에 대한 본질에 대한 이해이다. 후기구조주의 이론가인 리오따르(Jean-Francois Lyotard)는 정보사회에서는 정보와 지식이 오로지 “수행적 원칙(the principle of performativity)과 그 상품적 가치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평가받으며 이러한 원칙은 인문주의자들의“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신념을 여지없이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보사회에서도 로마인문학의 이념들이 완전히 유효성을 잃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정보사회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기술이 아무리 인간의 사고력을 모방(simulate)한다고 해도 로마인문학이 설정하는 인간의 종합적인 사고력을 대치할 수는 없고, 그것이 한 사회에서 가지는 실천적 의미는 정보처리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정보는 단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상품적 가치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정보의 처리가 한 사회의 지적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로마인문학의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의 인간적인 판단력과 지도력이 더 필요할 수 있다.

전통인문학이 새로운 학문의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은 르네쌍스시대였다. “인간성의 연구”라는 뜻을 가진 studia humanitatis 라는 말은 현대 인문학의 보다 직접적인 기원인데, 15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쓰인 이 말을 스콜라철학이 아닌 세속적 학문을 일컫는 말로 쓰였고, 여기에는 문법, 수사법, 시, 역사, 도덕철학, 고대 라틴어 및 그리스어 등이 포함되었다. 크레인에 의하면 르네쌍스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키케로나 퀸틸리안과 같은 로마인들의 계승자이지만, 동시에 성 오거스틴(St. Augustine)과 같은 신학자의 후예이기도 해서 희랍고전을 중시하되 가치있는 지식과 이상적인 인간성의 바탕을 고대희랍의 문화가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사랑은 우리가 창조된 원인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함으로써 우리에게 크나큰 행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다시 말해 예수의 사랑은 우리를 다시 불러들였고, 우리를 성장시켰다. 사랑에 의해서, 즉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이자 우리의 종착지로 되돌아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여러 개를 한 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이 사랑을 선행해야 한다.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난 후 앎의 힘과 습관을 획득한 다음에야 사랑을 실천한다.

 

바이브즈(Juan Luis Vives)에게도 여전히 고전을 읽는 일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러한 교육과 학습의 목적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으로 인한 앎이 인간을 동물적 본질로부터 끌어올려 신성(divine nature)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이브즈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실현은 인간의 신적 본질을 획득하는 것이며 인문적 교육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로마인문학의 사회성과 실천성도 계승하되 그것은 시민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치적 실천이 아니라 오만과 이기심, 헛된 호기심으로부터 해방되어 기독교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브즈같은 대표적인 르네쌍스인에게 있어서는 로마인의 웅변술과 같은 언어적 표현력을 얻는 것보다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기독교적 미덕의 전제조건이 되는 지식의 습득이 더 중요하지만, 글을 읽는 행위의 교화적 능력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의 대상을 말과 사물로 나누어보았을 때, 인간적 본질을 최대한 구현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형성하는데 사물보다는 말에 대한 학습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인문적 가치관은 르네쌍스 시대에도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인간성의 내용이 도시국가의 시민적 지도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달라지긴 했지만, 최고의 고전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의 체현(incarnation)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에 대한 종교적 숭배심은 종래의 고전적 문헌의 교화력에 대한 믿음을 일종의 종교적 경외심으로 강화시켰고, 이것은 결국 인문적 가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문학적 교육에 대한 신념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대표적인 기독교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는 당시의 대화적이고 논쟁적인 교육방식에 반발하여 텍스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정하게 확립된 이론이나 해석의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가 가진 의미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린시절에 받은 라틴어 교육이 철학과 형이상학의 논리적 해석에 의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키케로나 버질(Virgil), 호레이스(Horace) 같은 사람들의 문학적 교육의 우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젖먹이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세련된 화법을 배웠고, 나중에 차츰 대가들의 작품들에 소개되었다. 그러한 대가들의 작품들이 시, 수사학, 역사, 고전과 같은 인문학(liberal arts) 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학,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학습에 기초가 되었다.

 

요컨대 에라스무스는 고전에 대한 1차적인 이해야말로 모든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철학(the philosophy of Christ)을 익히는 것이 모든 학문의 최대의 목표였는데, 그것의 핵심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삶이고, 과학이기보다는 영감이며, 이성적 사고라기보다는 새로운 변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경건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서와 같은 고전적 텍스트를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해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적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직접적 경험은 그러한 경험에 의해서만 배양되는 세련된 감성과 감식력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게 되며 이러한 “문학적” 지성은 르네쌍스 인문주의의 이상적 인간형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에라스무스 인문학의 이러한 문학주의적 편향은 문학(Poetry)를 인문학의 최고의 경지로 간주한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러한 경향은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같은 낭만주의시인들의 시학뿐만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매쓔 아놀드(Matthew Arnold) 같은 사람의 인문주의적 문학론에 깊은 영향을 준다.

이러한 문학적 교양이 정보사회의 논리와 어느 만큼 공존할 수 있는가는 탈의미론적 성격의 정보가 갖는 반권위적 성격을 고려할 때 대단히 명백한 결론을 유도하는 듯하다. 르네쌍스의 문학적 인문주의가 전제로 하는 바, 고전에 통째로 들어있는 문학적 지식은 정보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유효한 지식으로서의 타당성조차도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르네쌍스의 인문주의의 물질적 배경이었던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워드프로세서의 스크린상의 전자활자로 변했고,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활자를 기반으로하는 “인쇄된 책”의 문화는 끝나고, 전자텍스트가 항시적으로 연결되어있는 “하이퍼텍스트”의 문화가 시작됨으로써 기존의 문학의 내용과 형식을 떠받치던 물리적 조건이 사라졌으며, 한마디로 전통적인 문학은 “죽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텍스트의 등장이 책을 둘러싼 문화와 책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라는 견해는 하이퍼텍스트론자들 사이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가령 “구텐베르크 애가(The Gutenberg Elegies)”라는 저서로 책문화의 종언을 주장한 버커츠 자신도 “문학의 죽음”이라는 장에서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라는 희망적 관측을 하고 있다.

 

나는 예술의, 특히 문학의 진정한 부흥의 가능성을 본다... 왜냐하면 문학은 내면적 탐색과 관계형성을 위한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모든 종류는-소설, 시, 그리고 희곡- 기본적으로 내용과 형식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진다. 언어의 구조는 그러한 지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읽기가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간단하게 기차를 갈아타서 한 종류의 시간에서 다른 종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충분히 강한 욕구가 생기면 우리는 페이지에 찍힌 말(Word)을 찾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 작품은 다시 심오한 시간의 강력한 영역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갈 것이다.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나의 낙관론은 흔들리지 않는데, 책은 하나의 안식처로, 그러니까 스크린에서 벗어나 그 주관성으로 인해 성스러워진 공간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리에게 독립적인 개인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는 한, 문학은 그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과장된 것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론: 정보시대 인문학의 진로와 과제

 

1) 정보시대의 인문학, 얼마나 위기인가?

 

정보시대의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정보화의 경향에 의해 새삼스럽게 발생한 상황이 아니라 17세기 이래 자연과학이 학문적 주도권을 놓고 인문학과 벌여온 기나긴 싸움의 끝자락에 나타난 현상이다. 물론 정보혁명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의해 생겨난 위기의 새로운 국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공리주의적 사고의 물질적 구현이라고 할 만한 컴퓨터와 전세계를 하나의 공간으로 묶는 정보통신의 연계망은 지식사회의 하부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제는 학문활동의 기본단위가 위계적 가치와 의미가 내포된 지식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의 기계적 표현인 정보로 변함에 따라서 소수 엘리뜨에 의한 독점적 지식의 체계를 대중의 의해 무제한적으로 접근가능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대치하게 되었고 이것은 인문학의 고유한 사회적 기능인 이상적인 인간성의 형성이라는 본래의 사회적 기능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보의 탈문자성은 글에 대한 인문적 믿음(때로는 종교적 신념에 접근할 만큼 강력한)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측면이 구텐베르크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문학의 죽음을 인문학자 스스로 선포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러나 정보화와 더불어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문제점들을 현단계에서 과장해서는 안된다. 정보사회가 기본적으로는 0/1의 전기적 신호인 비트(bit)로 환원되는 가치중립적이고 평면적인 정보에 입각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활자문화나 그 대표적 예인 인문적 지식을 완전히 대치할 것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멀티미디어에 의한 ”책“의 추방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단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 한 인문학의 효용이 여전할 것이라는 아놀드의 낙관론이 정보사회에서도 여전히 통하는 측면이 있다. 인간의 고유한 정신작용을 컴퓨터가 모두 “모방(simulate)"할 수 있다는 기술만능주의의 자만은 이론상의 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컴퓨터과학자들에 의해 스스로 밝혀지고 있다.

반면에 정보화의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인문학의 연구와 교육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측면도 없지 않다. 가령, 각 문화권의 인문학적 자산이 전자화되고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접근가능해 짐에 따라 각 문화권간의 좀더 긴밀한 접촉과 학문적 협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은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확보한 전지구적 지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일부에서 독점하고 있는 지식자원이 전세계적으로 동시적으로 공유됨에 따라 국가간 혹은 문화권간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구축된 정보인프라의 적절한 활용은 보편적인 인문적 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도 하다. 문제는 정보화가 원천적으로 인문정신의 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정보화가 궁극적으로 결과하는 것이 무엇이든 정보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환경을 현단계에서 어떻게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하는데 활용할 것인가일 것이다.

 

2) 정보시대 인문학의 한계와 가능성

 

정보화의 급속한 진전은 인문학자 자신들의 실감대로 학문적인 실천으로서의 전통적 인문학의 장래를 대단히 어둡게 하고 있다. 물론 정보사회라고 해도 철학, 사학, 문학 등의 기존 학문분야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전통적 인문학의 연구목표와 실천방식을 당장 바꾸거나 포기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정보사회가 만들어 낸 새로운 연구의 환경(전자도서관으로 대표되는 바 자료에 대한 접근성의 개선과 같은 것)과 도구들(문학작품의 스타일분석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소프트웨어 같은 것)을 이용하여 기존의 인문학 연구의 능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시각도 있고, 현재 인문학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정보화”의 노력은 이처럼 정보사회에서 인문적 가치가 가지는 위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없이 “정보화”를 도구적이고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아무리 인문학 연구의 효율을 높여준다고 해도 정보사회의 시대정신, 즉 공리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상업주의적인 원칙들이 그러한 전통적 연구의 결과인 “인문학적 지식”에 대하여 내리는 가치폄하적 평가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옥스포드대학 철학교수이자 영국학술원의 회장이었던 앤소니 케니(Anthony Kenny)는 1992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인문학 연구가 이용하고 있는 컴퓨터기술의 양과 수준이 놀랄 정도로 커지고 높아졌음을 지적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인문학 정보화로 인해 현 연구인력과 연구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도태되고, 연구의 관심이 문헌연구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소프트웨어 연구 및 개발로 전환될 것이며, 결국에는 현재의 인문분야의 연구인력이 다른 분야로 방출될 것임을 예측한 바 있다.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인문학 연구에 대한 정보화의 비판논리가 인문학자들의 입장에서 옳건 그르건 간에 인문학자들의 실업을 포함한 인문학의 축소조정이 인문학자들이 정보화의 추세 속에서 직면해야하는 하나의 필연적 사회현실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전통 인문학의 또 다른 측면, 즉 한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될 수 있는 이상적 인간성의 양성이라는 교육적 본질은 정보화사회라고 하여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문학이 그 동안 꾸준하게 견지해온 고전적 문헌의 초월적인 가치나 그것을 육화한 문자의 교화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무런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특정한 문화적 가치에 입각한 “이상적” 인간성이 계속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축적된(그리고 앞으로도 축적될)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사유방식으로 하이퍼텍스트와 같은 탈문자적(Post-Print) 다매체적(Multimedia) 텍스트의 새로운 문화적 활력과 교육적 기능성을 효과적으로 포섭할 수 있다면 인문학이 본래 함양하기로 되어있는 인간의 종합적이고 포괄적 사고력 자체는 정보사회의 전문화경향을 보완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계속해서 담당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인문학이 과거의 학문적 권위에 대한 향수 속에서 소흘히 해 온지도 모르는 이러한 사회교육의 기능을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걸맞는 방식으로 다시 수행할 수 있다면 학문적 제도로서의 인문학에 대한 구조조정의 압력을 성공적으로 이겨낼 가능성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보화 과정의 초반에 서있는 오늘날의 인문학은 정보화가 표방하는 이른바 “지식사회”의 근간을 이루며 시대를 선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지속적인 침체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도달할 위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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