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영어교육과 관련한 몇 가지 원칙: 삶의 언어와 시장의 언어

 

박찬길

 

 

2008년 여름, 영어교육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정치적 의제가 되었다. 인수위원회의 “영어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이 그 출발점이었다. 영어교육을 강화하여 한국인의 영어실력을 증진시키겠다는 것은 어떤 정부에서든 나올 수 있는 교육개혁안이지만, 이번에 특별한 것은 이번 방안이 교육개혁안의 여러 내용 중 하나가 아니라 한반도 대운하와 더불어 현 정부의 인수위원회가 가장 전면에 내세웠던 중점정책과제였다는 점이다. 인수위 보고서는 이 정책의 목표를 “모든 학생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기본 생활 영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영어 사교육 없이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국민들의 영어관련 스트레스를 단번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인수위원장의 그 유명한 “오륀쥐” 발언(실언)은 대중들의 영어컴플렉스를 잘못 건드렸고 그 결과 이명박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영어공교육 강화방안은 상당한 여론의 역풍을 맞아야 했다. 시민들의 예상치 못한 거부반응에 당황한 인수위와 정부는 영어 공교육 관련 정책목표 리스트에서 영어몰입교육 부문을 서둘러 철회했고 그 이후 이 방안은 광우병 정국에 묻힌 채 수면 밑에 잠복해 있다.

향후에 영어공교육 강화정책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지는 알 수 없지만, 보도에 따르자면 초중고의 전면적인 영어몰입교육 시행은 일단 유보했지만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수업(TEE, Teaching English in English)은 계속 추진될 전망이고, 해외동포를 활용하는 원어민 영어보조교사 확충안도 진행 중이며, 대입수능시험의 외국어영역을 대신할 국가영어능력시험도 계속하여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영어교육을 담당해왔던 영문과교수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영어공교육 강화정책에 대한 우려섞인 평가를 해왔고, 구체적인 대안들도 꾸준히 제시해왔다. 이러한 평가들은 정부의 방안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주도해왔고, 이러한 여론이 정부가 영어정책을 재조정하는데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영어교육에 접근하는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며, 문제가 많은 영어정책들은 영어교육 현장이나 여론의 추이에 따라 얼마든지 재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영어정책에 대한 보다 생산적이면서 깊이 있는 토론의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뜻에서 영어교육에 관한 최근의 논란에서 제기된 몇 가지 기본적인 논점들을 영문학자이자 영어교육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우리는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도대체 영어가 무엇이기에 새 정부의 주요정책목표로까지 등장해야 하는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2008년 1월 30일자로 발표한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은 사실상 이전 정부가 2006년 11월 17일에 발표한 『국민의 영어 역량 제고를 위한 영어교육 혁신방안』의 취지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부보고서들은 “왜”라는 질문 자체를 애당초 진지하게 제기하지도 않는다. 이명박정부의『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은 아예 “왜”라고 묻지도 않고, 노무현정부의『국민의 영어 역량 제고를 위한 영어교육 혁신방안』에서도 “기업체의 입직․보수․승진․ 등에 영어능력이 핵심요소로 작용하는 등 실용영어능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고 “실용영어 교육에 대한 학부모․학생들의 요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라고만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영어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특별한 정책을 세워야 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기업체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국민의 영어 역량 제고를 위한 영어교육 혁신방안』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2006년 11월 15일자로 간행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영어의 경제학』에는 우리 국민이 영어실력을 늘려야 하는 이유를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영어가 “글로벌 비즈니스의 공용어로서, 기업 활동을 위한 필수적인 언어”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며 “지식기반사회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영어정책에 관한 정부보고서들은 한 민간기업 보고서의 취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정부의 영어정책의 이념을 보여주는 자료는 그저 이런 것들뿐이다. 평소에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정책이 어떤 원칙에 의해 어떻게 결정이 되는지를 궁금해 하던 필자는 그 원칙의 간결함과 그 철학의 빈곤이 너무나 놀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체 관계자나 정부 당국자 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어교육관련 종사자들도 이러한 “영어의 경제학”에 감히 토를 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에서 영어가 교육된 이래 영어가 경제적 이익과 출세의 수단이 아닌 적이 없었다. 구한말 미국의 선교사가 선교를 목적으로 영어를 교습할 때도 학생들의 목적은 “벼슬을 얻는 것”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영어구사력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과거 100년간의 현실이 그러할진대 개인의 차원에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영어공부를 한다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어문정책을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의거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외국어정책은 그 외국어를 쓰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기본적인 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우리나라의 영어정책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우리나라와 외국, 특히 미국과의 관계의 본질이 경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서로에게 시장일 뿐이며, 상인과 고객의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우호선린관계는 경제적 관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외국어교육은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경제적 이해관계가 큰 나라의 외국어는 오로지 그 이해관계의 크기에 비례해서 중요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미국에서도 통상의 이해관계가 걸린 한국어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인들은 외국어를 배우는데 게으른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영어정책이 뜻하는 또 다른 측면은 한국과 미국 간에, 특히 한국어와 영어 간에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인다. 한국경제가 미국경제보다 우월할 수 없는 것처럼 세계무대에서 한국어는 영어와 경쟁할 수 없으며 이러한 영어의 압도적인 지위를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의 정치학』을 쓴 홀보로(Holborow)에 의하면 “영어에 관한 시장기반모델”을 가진 쿨마스(Coulmas)가 바로 이러한 경제주의적 언어관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의 명제는 언어들이 기본적으로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운명에 따라 발달하고, 전파되며, 죽을 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가 경제적 과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겨난다. 쿨마스가 “언어는 자산”이라고 했을 때 그가 뜻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다언어 사회들은 1인당 소득이 낮고 부자 나라들은 언어학적으로 동질적이라는 것이다...현재의 주류 경제학에서 언어학적 용어로 슬며시 옮겨가는 것이 쿨마스의 개념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다. 용어나 내용에서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롭게 흘러 다닌다. “자산으로서의 언어,” “액면가,” “언어의 경제” 등과 같이 언어를 경제로 비유하는 그의 어법은 결국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발언이 된다.

 

경제적 영향력과 언어적 영향력을 정확하게 동일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결국 언어의 세계에서도 시장논리에 의해 경제적 강자의 언어(영어)가 지배언어로 영속화하고 소수언어는 불가피하게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시장주의적 언어관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쿨마스의 지적이다. 이러한 설명을 들어보면 왜 우리사회에서 “영어모국어론”같은 뜬금없는 얘기가 나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말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언론에서 왜 자꾸 살금살금 인용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평생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 “실용영어를 배워야지 셰익스피어는 맨날 읽어서 뭣하냐”는 타박을 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모든 것이 경제로 통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경제주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필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한 자본주의시장만 있을 뿐 민주적인 원칙에 입각한 국제사회라든지 민족적 주체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세계질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세계는 오로지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있는 곳과 없는 곳, 현대문명이 있는 곳과 없는 곳, 영어가 통하는 곳과 통하지 않는 곳이 있을 뿐이고, 세계는 경제적 이윤을 실현하기 위한 정글이며 서바이벌 게임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하나의 외국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특권으로 물신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에 자리잡고 있고, 이들이 영어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한데 묶어 야만적인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대다수 국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문제를 시장주의 논리만 가지고 풀어서는 안된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그때부터 비로소 우리 영어교육의 세부사항들을 논의해볼 수 있다. 바람직한 영어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어가 단지 경제적인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영어권을 비롯한 세계의 민주적이고 호혜적인 선린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에는 우리가 사귀어야 할 나라가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얄팍한 장사꾼의 심성으로는 미국 한 나라와도 진정한 이해와 신뢰에 입각한 상호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하면서 말이다.

 

2. "American English or Practical English?": 어떤 영어를 배울 것인가?

 

미국문학을 전공한 필자의 선배가 영문과의 문학 전공 교수직에 응모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최종면접에서 이사장님께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전공은 American English입니까 Practical English입니까?” 영문과는 어쨌든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 이사장님의 소신이었고, 그 분의 인식의 지평에는 영어는 오직 두 가지 종류, 미국영어와 실용영어가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애당초 미국문학 전공교수에게 적절한 질문이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영어와 실용영어가 어떻게 영어의 종류를 포괄할 수 있는지, 미국영어는 그러면 실용영어가 아니라는 건지 등등의 질문이 그 선배의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지만 “미국문학이니까 아무래도 American English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재치있는 답변으로 무난히 일자리를 얻었다는 얘기다. 그 질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그 이사장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영어교육의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유용할 수도 있는 질문이다. 미국영어를 배울 것인가, 실용영어를 배울 것인가?

영어교육의 목적을 오로지 무역과 통상에만 두는 경우, 배움의 대상이 되는 영어는 오로지 시장의 언어로서의 영어다. 앞서 말했다시피 시장에서 미국이 갖는 지위는 압도적이며, 따라서 미국영어의 유용성도 극대화된다. 따라서 한국의 영어시장에서는 당연히 미국영어가 표준영어로 통용되고 원어민 선생도 백인 미국인이 선호된다. 영어공부의 목표는 미국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용감한 엄마들은 자식들의 “본토발음”을 위해 자식의 혀에 칼을 대기도 한다는 엽기적인 뉴스가 들리기도 했다. 미국인과 거래를 잘 하려면 아무래도 미국인과 “똑같은” 영어를 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것은 일견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인들 자신들도 서로 “똑같은” 영어를 하지 않을뿐더러, 한국인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과 “똑같은” 영어를 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어공부를 웬 만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소통” 자체가 중요하지 발음이나 액센트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소위 실용영어에 대한 강조는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지난 정부의 『국민의 영어 역량 제고를 위한 영어교육 혁신방안』에도 실용영어에 대한 강조가 어김없이 나온다. 부진한 영어교육의 “원인분석”에서 “‘실용영어능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는데도 학교의 영어교육은 “문법․독해․번역 등 학문 중심의 영어능력 향상에 치중”하기 때문이 며 그것은 실용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부족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길지 않은 정부의 보고서에 주문처럼 반복되는 실용영어는 과연 무엇인가?

실용영어라는 것은 실제로 사용한다는 뜻일 텐데, 정작 어디에서 쓴다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보통의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살면서 영어를 “실용적”으로 쓸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 앞에서의 경제주의적 관점의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아마도 그 주된 용도는 무역과 통상, 즉 비즈니스의 과정일테고, 정부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체의 요구도 실상 장사에 필요한 시장의 언어로서의 영어일 가능성이 많다. 학교에서 장사에 필요한 영어는 가르치지 않고 “문법․독해․번역 등 학문 중심의 영어능력 향상에 치중”하는 것이 그렇게 불만이라면 학교의 모든 영어과목을 “비즈니스영어”로 바꾸면 된다. “문법․독해․번역” 등의 교육을 배제하면 한국에서의 국제적 비즈니스에 필요한 그 많은 서류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몹시 걱정이 되지만 정부의 방침이 확고하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미국인(혹은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비즈니스 파트너와 “영어회화”를 유창하게 하면서 “소통”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소통”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러한 종류의 “소통”이 목적이라면 따라하기도 힘든 미국인들의 본토영어보다는 1500단어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는 글로비쉬(Globish)를 영어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이 낫겠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미국영어냐 실용영어냐의 문제는 그 목적이 시장의 언어를 익히는데 있는 한 그 수준의 격차가 있을 뿐 경제적 이해에 봉사하는 기능주의적 언어를 지향한다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미국영어냐 실용영어냐를 묻는 것은 사실상 학교에 갈 때 “버스를 타고 가고 싶냐, 건강에 좋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싶냐”하는 질문처럼 부조리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영어를 세계의 공용어(lingua franca)로서 균형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일견 온건해 보이는 주장도 충분한 답이 되지는 못한다. 영어를 특정한 나라, 특정한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서 보편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매체이기만 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탈민족적인 국제질서 안에 내재된 지배-종속관계를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영어는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객관적 국제질서의 매체로 기능하는 듯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시장경제 안의 중심부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이 “영어의 정치학”의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비록 외국어라고 할지라도 시장의 언어 혹은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특정한 용도를 가진 기능어로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배어 있는 진짜 언어, 삶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외국어 배우기를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무역과 통상과 같은 특정한 목적에 복무하는 기능적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결국 비즈니스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미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취향에 무지한 상태로 미국인 비즈니스 파트너와 무슨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겠는가? 학교의 영어수업에서 맥락과 내용이 제거된 의미없는 영어구절을 익히는 기능훈련에 치중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 영어에 “노출”된다고 해도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사유가 전제되지 않는 언어활동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나라의 모든 영어학습자가 셰익스피어를 원서로 읽지는 않는다고 해도 어느 수준에서 셰익스피어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근거도 없이 비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원어민과 같은 영어학습 환경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 원어민들이 초중고의 “영어”시간에 영어로 된 고전을 읽으며 영어를 배운다는 사실은 왜 애써 외면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한국영어영문학회 심포지움에 참가했던 서울대 김길중교수의 표현을 빌면 ‘실법’없는 ‘어법’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3.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환경: “미국과 똑같이”?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아이디어는 영어교육의 환경을 가급적 “미국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영어로만 말하고, 영어로만 듣고, 영어로만 쓰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기도를 필두로 지방자치단체 마다 우후죽순으로 만들어 골칫거리가 된 영어마을들, 대학의 영어기숙사와 영어라운지, 영어로만 말하는 잉글리쉬 코너 혹은 잉글리쉬 존, 영어기숙사, 영어캠프 등이 모두 그것에 해당한다. 『영어의 경제학』에서 제안한 특정한 지역을 지정하여 영어만 쓰게 하는 영어 “상용화” 방안도 같은 아이디어의 확장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영어를 교습하는 가장 좋은 환경은 영어원어민(혹은 원어민수준의 영어구사자)에 의한 영어로 진행되는 영어수업(이른바 TEE, Teaching English in English)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대학에서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라는 요구로부터 영어유치원과 영어유아원에 이르기까지 전범위의 교육기관에 하나의 국제적 표준으로 권고되고 있다.

한국사람이 영어를 미국사람처럼 잘 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한국의 영어교육의 지상과제라면 가장 좋은 방안은 되도록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가급적 일찍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이다. (경제력이 허용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아무런 조건없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몰입교육이 최고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영어의 바다에 빠지라고 하겠는가. 영어교육은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영어조기교육론은 이른바 언어습득의 “결정적시기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것 역시 영어를 배우는 최상의 방법은 어른이 돼서 영어를 외국어로서 학습(learn)하기보다 어린 아이 때 모국어처럼 습득(acquire)하는 것이 좋다는 가설에 기반을 둔 것이다. 한국의 영어학습에 대한 이러한 통념들은 영어학습의 목적을 경제적 동기에 두는 것만큼이나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누구라도 이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미국과 똑같이” 이론은 오로지 영어를 잘 배운다는 목표에만 집중되어있지 그 한국인 학습자의 한국어가 그 결과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앞서 소개했듯이 한국어같은 주변부 언어의 필연적 소멸설을 신봉하고 따라서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들, 차제에 지배적인 언어인 영어로 모국어를 미리 교체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라면 “미국과 똑같이”의 교육방침이 100% 옳으며 거기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필자는 영미문학연구회 학술대회에서 김명환 교수가 표현한대로 한국의 영어교육은 영어라는 단일 종목이 아니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고려하는 “이종경기”여야 한다고 믿는다. 대다수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모두 미국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라는 타자와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정정호교수의 말을 빌면 우리는 영어를 공부함에 있어 “‘영어’라는 외국어로서의 언어가 가진 타자성에 주목해야” 하며 “객체로서의 타자는 낯설게 함으로써 언제나 주체를 탄력성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한 주장만은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원어민수준으로 구사하는 인력의 산업적 유용성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극대화되며, 그것은 갈수록 늘어나는 “연어족”의 존재로 입증되는 사실이다. 한국최대의 영어학원 최고경영자의 실감나는 증언에 의하면 국제적 비즈니스를 위주로 하는 한국 기업이 주로 필요로 하는 인력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 혹은 한국어 구사력을 상실한 영어능통자가 아니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도 한국적 정서와 문화를 습득하고 있는 인력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업은 이미 인력구성이 많이 국제화되어 순수한 영어관련 업무는 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소위 “본토” 외국인들을 쓴다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교육이 “이종경기”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의 영어교육을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맡기는 것이 더 좋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버려야 한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이 한국인의 언어적 정체성을 포기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면 모국어로서 한국어의 기반이 갖추어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영어에 노출하는 것에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격이 의심스러운 외국인을 “원어민”이라는 이유로 한꺼번에 수입하여 한국의 영어현장에 풀어놓기보다는 한국인 영어교사의 수업을 돕는 “보조교사”로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다. 대학의 영어수업은 이제 원어민에 의한 TEE가 보편화되는 추세이다. 필자는 지난 10수년간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직접 그 실무를 지휘하기도 했다. 필자와 같은 경험을 가진 많은 영문과 교수들의 증언도 그러하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TEE가 보편화됨에 따라 학생들은 그전 보다 훨씬 더 세련된 발음으로 거침없이 (의미없는!) 말들을 구사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력과 수준있는 영어문장에 대한 해독력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원어민 교사들의 수준도 그들에 대한 평가의 방식과 고용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역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필자는 “한국인 여성은 왜 미국인 남성과 결혼하고 싶어할까?”라는 작문숙제를 내준 원어민교사를 필자의 학교 강단에서 물러나게 하느라 2년 넘게 실갱이해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용”을 제거한 순수한 기능교육으로서의 영어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케 한 에피소드였고,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감성을 고려하지 않은 영어교육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미국인이 되지는 않더라도 미국사람처럼 영어를 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영어공부를 하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쯤 품어봤을 것이다. 영어교육의 환경과 방법론을 “미국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경향은 대체로 이러한 보편적인 희망에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인정하자.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다. 꿈은 클수록 좋다고 하지만 그러한 비현실적인 목표는 정상적인 영어교육을 방해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습득(acquire)하기보다는 외국어로서 배울(learn) 수밖에 없고 또 한국인으로서의 언어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모국어처럼 유창한 영어회화가 아니라 목적과 용도에 맞는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배워야 한다. 아주 쉬운 영어라도 우리가 생각해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배워야지 무조건 미국사람처럼 생각하고, 미국사람처럼 말하는 법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도록 배워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영어교육의 환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따라야할 지침은 “미국과 똑같이”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이어야 한다.

 

4.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 시장의 언어에서 삶의 언어로

 

이명박 정부의 영어공교육 강화방안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토론회에서 정부안의 긍정적 측면을 외롭게 주장하던 한 참석자는 피곤한 표정으로 이렇게 공박했다. “그러면 아예 영어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인가? 1년에 수천만원에 불과하던 영어관련 예산을 4조로 늘려서 전 국민에게 영어써비스를 제공하겠다는데 왜 반대하는가?” 우리 사회에는 영어에 관한 신화가 너무나 공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내용과 방식, 목적과 용도를 불문하고 영어공부는 무조건 많이 할수록 좋다는 식의 억지가 통할 때가 많다. 필자 역시 “영어관련 종사자”로서 국민들이 영어공부열기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따져봐야 하는 것은 영어 관련 예산을 그렇게 늘림으로써 반드시 줄어들어야 하는 부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렇게 해서 추가적으로 얻는 “영어실력”이 과연 그러한 “희생”에 값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론이 나올 때 마다 정부당국이나 기업담당자들은 검증하기 어려운 통계를 제시하며 영어경쟁력의 강화가 가져올 부가가치의 증가를 액수(달러로!)로 설명한다.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영어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이른바 “투자효과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분들이 투자하고 싶어하는 영어는 물론 “문법․독해․번역 등 학문중심의 영어능력”과는 상관없는 “실용영어”일 것이다. 그런데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가 이들이 “실용영어”라고 부르는 시장의 언어일까? 보통 사람들이 흔히 “영어회화실력”이라고 이해하는 “실용영어”의 능력이 과연 우리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익”을 신장시킬 수 있을까?

영어공교육 논란을 완전히 잠재워버린 것은 주지하다시피 미국소고기 수입재개와 관련된 논란이었다. 국민건강권, 검역주권을 통상이익과 쉽게 맞바꿔버린 새 정부의 무책임한 협상전략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 촛불시위에 나섰다. 정부 당국자들은 아직도 이러한 시민들의 분노를 미국소를 무조건 광우병소라는 식으로 “왜곡보도”한 MBC TV의 “PD수첩”의 선동 탓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당시 시민들의 분노를 더 강하게 촉발한 것은 미국소고기 관련 대미협상을 주제로 방영된 5월 8일자 “100분토론”이었다. 여기에 출연한 농림부와 외교통상부의 통상외교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대미협상이 국제적인 기준에 맞추어 진행한 협상전문가들끼리의 협상이었음을 주장하면서 그 정당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반대편 패널의 하나로 출연했던 송기호변호사는 우리 측 협상당사자가 4월 25일자 미연방 식품의약국(FDA)의 동물성사료 금지조처 관련문건을 잘못 번역했다고 주장하며 그 영어원문을 제시했고, 정치적 토론의 방향은 느닷없이 영문번역의 문제로 옮겨갔다. 결국 정부당국자가 오역을 시인하고 공식 사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쇠고기협상은 수년간 끌어온 중요한 통상현안이었고, 문제의 그 협상은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최초로 타결한 대미협상이었다. 그렇게 큰 “국익”이 달려있는 국제적 협상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던 원인중의 하나가 결국 우리 측 외교통상 전문가의 부족한 영어독해력이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가 회화중심의 “실용영어”라고 계속 주장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아무리 우리에게 낯선 외국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내용, 정치경제적 배경을 제거한 영어는 죽은 기호일 뿐이며 참된 “실용”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상대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이 순전히 장사꾼의 마음으로 배우는 도구적 언어로서의 영어는 심지어 “시장의 언어”로서도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점이 100분 토론의 “오역소동”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영어교육전문가들이 갖가지 “설”들을 퍼뜨리고 있지만(조기교육을 해야 한다, 몰입교육을 해야 한다, 원어민에게 배워야 한다, 문법 말고 회화를 배워야 한다 등등), 필자의 생각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장사꾼의 얄팍한 마음에서 벗어나 상대국의 국민을 단순히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그 외국어를 배우는 옳은 자세다. 그리고 그래야만 그들의 말을 “시장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서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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