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인문학 평가,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평가제도: 아무리 분개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
대학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대학도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기관인 만큼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 우리 대학에서 일어난 변화는 고등교육의 이념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변화의 위험성을 감지한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이 대학의 위기와 고등교육의 종말을 증언하며 항의해왔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모두 다 알다시피 대학의 기업화와 그에 따르는 경쟁의 강화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면서, 교수들에게 더 많은 연구업적과 더 많은 연구비 수주를 요구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강화된 경쟁체제를 추동하는 것은 갈수록 견고해지는 대학평가제도이다. 대학평가제도는 이제 어떤 특정 평가기관이 특정한 대학을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모든 지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그 영역을 전면화하고 있으며, 대학은 교수를, 교육당국은 대학을, 국제적인 평가기관들은 나라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며 범세계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만 해도 주요대학들은 소위 4대 세계대학평가의 대상이 되어있고, 그러한 세계대학평가의 압력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각 대학의 교무처를 통해 개별교수들에 대한 연구업적평가라는 미시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어떤 개인이 혹은 어떤 대학이나 어떤 나라의 교육당국이 이러한 대학평가제도에 일정하게 불만을 제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당장 큰 변화를 가져올 것 같지 않다.
대학평가제도의 전면화는 모든 영역에 다 영향을 미쳤지만, 전통적으로 대학교육의 핵심으로 여겨져 왔던 인문학 분야에 훨씬 더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은 서양의 중세 대학에서부터 대학의 가장 핵심적인 교육과정이었고, 근대대학의 모델이라는 19세기 초 독일의 훔볼트(Humboldt)대학의 프로그램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낭만주의적 자아의 완성, 즉 한 인격의 도야와 완성은 훔볼트대학이 표방한 근대적 대학교육의 핵심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학이 새롭게 추구해야 할 고등교육의 원칙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대학교육의 이상은 오랫동안 현실로 실현되었다기보다는 19세기 독일에서 잠깐 꽃피웠을 뿐,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년 동안 보다 실용적인 교육을 원하는 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20년간 정착된 대학평가제도가 인문학에 미친 해독은 지난 200년간 인문학에 가해진 공격의 해악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본질적이고 치명적이다. 인문학에 대한 과거의 비판은 대부분 그 비실용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평가제도는 인문학 종사자들로 하여금 인문학 고유의 연구목적과 의제설정, 인문학 고유의 방법론적 전통을 자발적으로 폐기하도록 유도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가령 훔볼트의 생각대로, 인문학 프로그램의 존재의의가 한 나라의 부흥을 이끌어갈 완성된 인격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자. 이를 위해서 대학의 프로그램은 어떤 실용적인 지식을 주입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소양을 키워내기 위해 철학, 역사, 문학의 고전을 읽는다. 현재에도 일각에서는 기초교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하지만, 교수평가의 중요한 일부로서 도입된 강의평가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체의 완성을 교육의 성과로 측정하지 못한다. 교육의 효과는 오로지 학생들에 의해 평가되는 “소비자만족도”로 수치화될 뿐이다. 또 학생들은 실용적인 능력의 증진과, 수치화된 공인점수, 그리고 학위라는 자격증을 원할 뿐, “인격체의 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인문학을 신봉하는 교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또 훔볼트는 대학의 발전을 위해 국가의 지원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전제했으며 고등교육의 목적 자체가 독일제국의 부흥이라는 국가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지만, 국가가 개별적인 연구자의 연구에 개입하는 것을 맹렬하게 반대했다. 인격의 도야와 완성이란 자발적인 성장의 결과일 뿐,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훔볼트는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평가제도는 연구와 교육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인문학 교수들은 대학평가에서 연구실적으로 인정되는 “학술지논문,” 즉 원고지 120장 내외의 글 이외의 다른 어떤 형식의 글쓰기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진행한 “연구”의 내용을  강의에 반영하는 일도 물론 없다. 중요한 것은 약속된 강의를 약속된 시간에 실시하여 학생들을 화나지 않게 하는 일이지 정작 강의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강의평가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평가에서 대학의 연구비 총액은 그 대학의 연구력 혹은 그 대학의 내재적 가치와 동일시된다.  교수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에서 연봉이 한 개인의 가치를 대변하듯 대학에서도 각 교수의 연구비 총액은 그의 연구능력 즉 그의 내재적 가치와 동일시된다. 매년 편성되는 정부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는 당국이 선정한 연구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나 연구집단에게 주어진다. 개별 연구자가 “자유롭게” 설정한 연구주제도 실상은 당국에서 이미 설정한 연구의제를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개별 연구자들에게도 이제는 연구의 내용보다 연구비 수주의 가능성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수들은 이제 연구가 중요해서 연구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를 한다. 이러한 본말전도의 가장 큰 폐해는 그것이 연구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제도적으로 말살한다는 것이다. 교수들이 학문적 열정이 아니라 “돈”과 “점수”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그들이 수행하는 소위 “연구”의 결과란 과연 어떤 성격의 “업적”일까?  
대학평가를 교수들에게 적용하면 교수평가가 된다. 보통 교육과 연구 두 영역, 혹은 봉사 같은 기타 영역까지 세 영역으로 나뉘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연구이다. 그리고 평가의 핵심은 물론 교수들의 연구실적을 최대화하는 데 맞춰져 있다. 갈수록 정교해지는 연구평가제도는 모든 교수들의 생활을 강력하게 옥죄고 있는데, 가장 치명적인 폐해는 그것들이 교수들에게 연구의 시간, 사유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교원평가를 매년 실시한다.  그 이유는 세계대학평가와, 교육부와 대교협, 외국평가기관과 연계된 각 언론사의 대학평가가 1년 단위로 실시되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인문학의 경우, 창의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원전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훔볼트가 “고독과 자유”를 연구의 기본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2007년 독일의 인문학 지원프로그램 “인문학 연구의 자유”는 연구자에게 “돈”이 아니라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해도, 1년을 단위로 한 대학평가의 관행이 쉽게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계대학평가를 담당하는 4대 기구는 적어도 그 절반이 상업적 기관이고, 그들로서는 더 짧은 기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 즉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 본연의 목적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당국이나 관료의 입장에서도 모든 예산집행이 회계연도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연구비 예산의 효과를 매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매년 발표되는 대학별, 분야별, 프로젝트별, 연구비 액수별 국내 외 순위를 그들의 “성적표”로 이해하는 각 대학의 집행부가 연차별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의 머릿속에 진리의 탐구와 인재의 양성 같은 고등교육의 이상이 더 이상 의미있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대 세계랭킹 산출기관의 운영자는 자기들의 통계의 신뢰도와 세계적 영향력, 그리고 그에 따라 늘어나는 부대수입 등이 우선적인 관심사일 것이고, 교육관료들은 어떻든 자신의 임기 중에 한국대학의 “경쟁력”이 높아졌음을 외부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싶을 것이며, 또 대학의 총장들은 자신의 임기 중에 자기 대학의 국내외 랭킹이 상승했음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식의 경쟁에 골몰하는 오늘날의 대학이 더 이상 학문을 도야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학문적 공동체가 아니라 연구인력을 최대한 “가동”하여 연구-교육상품을 생산·판매하는 기업이 되었음은 이제 숨겨야 될 비밀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인문학 평가: 최근의 실태

사실 대학이 급속하게 기업화되고, 그에 따라 교수들의 “생산성”을 새삼스럽게 문제삼기 이전에는 그들의 연구실적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특히 인문학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했는데,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BK(Brain Korea), HK(Humanities Korea) 등 정부주도의 대규모 연구비 지원정책에 인문학이 포함되고, 여기에 각 대학의 인문학 부문이 경쟁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인문학 교수들의 연구업적이 새삼스럽게 엄정한 “평가”의 잣대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 교수들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자료가 아직 많지 않은데, 현재까지 나와 있는 것 중 가장 포괄적인 자료는 2006년 9월에 발행된 광주교대 교육학과 박남기 교수의 “대학별 교수업적평가 현황분석 및 교수업적 평가 모형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보고서는 국내 4년제 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했고, 총 1338명의 현직교수들이 참여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우리나라 4년제 대학 전체의 실태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 평가에 관해 이 보고서가 보여주고 있는 바는 필자 자신의 경험을 광범위한 실증자료로 확인시켜주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연구부문에 관한 인문사회분야의 교수업적평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인문사회분야의 저서 분야에 대한 가점을 주고 있으나, 이의 가치를 국제학술지에 대한 가치 이상으로 산정하는 대학은 없었음(좀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임).
-가중치는 국제학술지에 대한 비중이 제일 높으며, 그의 1/2비중을 국내학술지 등에 두고 있음.
-전반적으로 연구업적의 인정 범위가 엄격해지고 있음(SSCI, 국내 학진등재 등의 논문이 아닌 경우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다 하더라도 매우 그 비중이 낮음(인정율이 1/2에서 1/10 정도까지 다양).
-평가결과는 승진, 재임용 등과 연동되어 활용되고 있었으며, 연구업적이 그 과정의 주요요건이 되고 있음. 
 
인문학 연구에서 저서의 형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저서보다 국제논문에 더 큰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문학 교수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또 연구업적의 인정범위가 점점 더 엄격해지고, 국제논문 혹은 연구재단의 등재지 이외에는 인정범위에서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거나, 이러한 연구실적 평가의 결과를 승진과 재임용 등 중요결정에 더 깊이 관련시키는 것도 우리가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 보고서에서 “‘많은 업적’보다는 ‘좋은 업적’을 낼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고, “학문분야별 차이를 반영”하며, “정부의 SCI 논문수 위주의 평가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297면) 제시한 대안적 평가 모델(308-309면)도 저서에 대한 가중치를 늘렸다는 것과 국제학술지에 대한 가중치를 조금 줄였다는 것 이외에 기존의 평가기준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연세대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의 논문은 인문학 분야를 특정하여 연구업적평가의 실태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데, 장기적 관점의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하고, 개별 논문에 대한 질적 우수성 평가가 필요하며, 연구결과물에 대한 장기인용도가 반영되는 평가기준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시했지만 김교수가 제시한 대안적 평가모델도 박남기 교수의 모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더 최근에 출판된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정연경 교수의 연구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적 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 실질적 어려움을 고백하면서, 결국 SSCI와 A&HCI 등의 등재지 국제논문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현 제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들의 연구는 대체로 타당한 진단과 정당한 방향제시를 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문학 평가기준은 날이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를 포함한 인문학 교수들의 실감이다. 
가령 필자가 근무하는 이화여대는 최근(2014년 6월)에 새로운 교수업적평가 기준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의하면 국제논문에 대한 가중치는 이전의 연구재단 등재지 기준 최대 500%(이전에는 300%)로 오히려 더 증가했다. 또 인문학 분야에서도 승진 및 승급의 기존요건으로서 각각의 등급마다 무조건 A&H CI급 국제논문을 한 편 이상 쓰도록 의무화하는 조항도 신설했다. 가령 조교수가 부교수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700%의 연구업적을 내야 하는데, 적어도 240%(Scopus급 논문 2편) 이상은 영어로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년보장을 받은 정교수들에 대한 평가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는 오래전부터 정교수로 정년보장을 받은 이후에도 정교수를 A, B, C로 나누어 내부승급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6년을 기본연한으로 한 각각의 등급에 각각 800%(이전에는 600%)의 연구업적을 요구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중 최소 240%를 영어논문으로 채우도록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승진승급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점이다. 이화여대의 모든 교수들은 매년 최소 연구의무를 채워야 하고, 인문학의 경우 이것이 175%이다. 논문으로 이것을 채우려면 연구재단 등재지 2편(200%)을 쓰거나 C급 이상의 국제지 논문을 한 편 써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저서나 번역의 경우는 단독연구인 경우에도 최대한 100%(이전에는 200%) 밖에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점수를 채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연간의무연구점수를 채우지 못한다고 해당연도에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년의 연구성과는 매년 결정되는 인센티브의 액수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매년 개인별, 학과별, 연구소별로 지원하는 연구비신청서의 기본지수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항상적으로 상당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년보장을 받은 정교수들은 그나마 연간의무연구점수를 매번 채워야 하는 부담에서 다소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매년 평가에 기준하여 지급되는 인센티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학과별로 합산되는 학과의 연구점수에 따라 각종 학과별 프로젝트지원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학과의 실적을 고려한다면 매년의 업적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학교당국은 교수 개인의 연구실적만 집계하는 것이 아니라 학과별, 전공별, 단과대학별 연구성과를 집계하여 공표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교내의 자원을 분배하는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사실상 웬만한 배짱과 결단력 아니고는 어떤 직급의 교수라 하더라도 이러한 능력별 보상 시스템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필자가 소속된 대학의 예를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악화일로에 있는 인문학 교수들의 연구조건을 좀 더 정확하고 현장감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한국의 모든 대학이 모두 이와 똑같은 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모든 대학이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주도하는 대학평가의 틀에 똑같이 놓여있는 한 다른 학교들의 조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같은 분야의 교수라고 해도 학교와 세부전공이 다르면 다른 쪽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자기가 속한 학교의 경우라고 해도 규정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규정조차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 주변의 수많은 어리숙한 인문학 전공교수들은 자기 자신의 연구실적평가의 결과를 통보받고 나서도, 그 점수의 의미가 뭔지, 왜 그런 점수가 나왔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수치화된 자신의 객관적인 “성적표”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모멸감에 “괴로워할” 뿐이다. 알고 보면 인문학 전공교수들은 이러한 제도에 제일 많은 피해를 보면서도 그 세세한 측면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제도 자체가 복잡하고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그 제도의 적용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현상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교수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직업적 자긍심을 크게 손상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수들의 드높은 사유의 높이에서 보면 연구업적 평가제도의 남루한 현실은 극도의 부조리일 뿐이고, 그것의 세세한 공과를 점수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학문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내 눈을 가린다고 해서 남루한 현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성적표를 치워버린다고 성적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저항감에다가 “나만 아니면 된다”거나 “나만 알면 된다”는 식의 얄팍한 이기주의가 합쳐져서 갈수록 악화일로에 있는 대학평가제도를 무책임하게 방조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가능한 제도개선의 여지마저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초라한” 인문학의 성적표?

그렇다.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대개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위에서 살펴본 연구업적 평가제도와 관련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왜 우리는 부당하게 취급되는가?  인문학자들은 분개한다. 하지만 비분강개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암암리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연구환경, 그러니까 어떠한 사회, 정치적 압력 혹은 경쟁이 없이 오로지 연구주제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꿈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환경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우리의 대학은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성직자를 길러냈던 중세서양의 대학이나 훔볼트가 살았던 1809년의 베를린대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꼭 노벨문학상을 타야 문학이 융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춤과 노래는 물론이요 요리까지도 꼭 오디션을 해서 1등을 가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도 인문학이 놓인 상황을 좀 더 현실적인 눈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인문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의 근거없는 낙관론이나 이제 인문학은 끝났다는 식의 성급한 비관론, 혹은 알고 보면 인문학이 여러 모로 유용하다는 현실영합론에서 벗어나려면, 좀 괴롭더라도 우리의 “성적표”를 좀 더 차분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연구재단 통계에 따르면, 2011년 기준하여 우리나라의 전체 연구개발투자는 총 450억불(4조 8479억원)으로 세계 6위 수준이고, 이는 영국의 연구개발투자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2011년에 정부가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인문학을 지원한 액수는 사회과학과 합쳐서 총 2085억원이며, 이는 정부가 학술연구를 위해 지원한 전체액수의 10.8%에 해당한다.  같은 기간 4년제 대학에 근무하는 인문학 전임교수가 수주한 연구비 총액은 총 1318억원(전체대비 2.7%)이며, 그중 중앙정부에서 제공한 연구비는 952억원(전체대비 2.5%)이다.  2011년 기준으로 4년제 대학 인문학부문 전임교수 수는 10,535명(전체대비 14.9%)이므로, 인원수로는 14.9%의 집단이 액수로는 2.5%를 수령했으므로 인문학은 정부로부터 다른 분야의 약 16.8%정도의 재정적 지원 밖에 받지 못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문학 교수 6명 정도가 받을 금액을 다른 분야의 교수 한 명이 받았다는 뜻이다. 인문학에 대한 이러한 “홀대”는 인접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과 비교해도 분명히 드러난다. 2011년 기준 4년제 대학 사회과학 교수들이 수주한 중앙정부 연구비는 2011억원(전체대비 5.3%)이고 이것은 사회과학교수들이 인문학교수보다 2배 이상의 지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1인당 연구비를 비교해 봐도 인문학은 1251만원, 사회과학은 2013만원으로 사회과학이 인문학의 1.6배의 연구비를 수주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원받은 인문학교수들은 어떤 성과를 내었을까? 
연구실적이 대체로 1년 후에 반영되었다고 가정하고 2012년의 실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문학의 1인당 평균 0.8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사회과학은 1인당 평균 0.96편을 게재했으므로 절대치에 있어서는 사회과학이 1인당 0.16편을 더 많이 게재했다. 그러나 논문 1편을 만들어내는데 들어간 평균연구비를 비교해보면, 인문학이 1564만원, 사회과학이 2097만원으로 투자대비 생산성으로 치자면 사회과학은 인문학의 75%에 불과하다. 같은 방식으로 자연과학은 1인당 평균 1억2천514만원, 1인당 평균 0.98편, 1편당 1억2천769만원, 투자대비 생산성은 인문학의 12.2%이다. 공학의 경우는 그 격차가 더 심하다. 1인당 평균 1억5천799만원의 연구비에 1인당 평균1.08편을 냈으므로 1편당 1억4천629만원, 생산성은 인문학의 10.7%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교는 인문학이 공학보다 10배쯤 훌륭하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대학의 연구실적 평가제도가 원용하는 수량적 평가, 특히 그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절대 수에서도 인문학의 실적이 그렇게 열등하지 않으며, 논문의 투자대비 생산성을 따지자면 인문학이 오히려 나은 측면도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잣대로 작성된 우리의 “성적표”도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간단한 계산을 통해서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이렇게 획일적인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금방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 평가기준, 과연 정당한가?

사실 대부분의 인문학 교수들이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학문적 성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내용을 묻지 않고 무조건 “편수”와 “건수”를 센다든지, 투자대비 생산성을 따지는 일의 무의미함은 위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쟁과 생산력 담론은 여전히 연구실적 평가제도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으로 작동되고 있다. 학문적 성과를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그 지표를 비교하여 개인 간, 대학 간에 경쟁을 붙이는 정책은 비단 인문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공계의 연구모델을 기본으로 하여 개발된 수량적 평가방식을 인문학에 원용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문학의 “정상적인” 연구를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이미 인용한 간단한 통계를 바탕으로 이화여대의 평가기준을 검토해 봐도 그 문제점은 금방 드러난다. 우선 1인당 평균 0.8편(국내 0.76, 국제 0.02)의 논문을 생산하는 인문학 교수들에게 1.75편의 논문을 기본의무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인문사회계열교수의 91.7%가 국내학술지에 논문을 싣고 있으며 국제논문의 1인당편수가 0.02에 불과한데도, 국제학술지의 논문에 최대 500%까지의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국내논문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평균적인 논문생산능력의 2배 이상 쓰거나 아니면 가산점이 붙는 국제논문을 집필하라는 뜻이다.  인문계 교수들의 “실태”를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단행본 저술의 경우 인문학이 1인당 0.17편(전 학술분야에서 1위)을 생산하면서 저술전체의 28.2%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의 새 규정은 저서의 출판을 최대 1편의 국내논문에 해당하는 실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인문학교수들이 “본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러한 연구실적 평가제도는 이화여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 이화여대가 처음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결국 세계 4대 대학평가라는 학문적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만들어낸 평가방식이고, 이화여대의 제도는 그것을 국지적으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교수들은 어떻게 평가받고 싶은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생산성에 대한 맹신과 무조건적인 경쟁에서 벗어나서 정상적인 평가, 즉 한국연구재단의 보고서가 보여주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실태”에 입각한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연간 기본연구의무를 전체평균인 0.8편으로 낮추고, 1인당 0.02편에 불과한 국제논문에 대한 과도한 우대를 철회하는 것이 우선 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철회된 가산점을 인문학 연구활동의 본령인 저서에 부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화여대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인문학의 세계적 경쟁력”이라는 황당한 신화에서 벗어나서 “세계 4대 대학평가”로부터 시작되는 학문적 먹이사슬에서 인문학을 과감하게 제외시킴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정부의 입장에서야 인문학은 연구비 “2.5%”의 비중일 뿐이고, 인문학 연구자 91.3%가 우리말로 출판하며, 인문학 분야의 국제논문 비중이 전체의 2%에도 미달하는 만큼, 인문학을 한국 연구생태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해도, 대세에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부의 인문학 진흥정책과 인문학 평가

2013년 7월 25일, 박근혜정부는 대통령직속으로 “문화융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현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관심과 노력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통령이 직접 밝힌 위원회 설립의 취지였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는 없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현”에 “범정부적인 노력”을 기울여준다는 데야 인문학 종사자로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 노력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2013년 10월에는 문화융성위원회 산하에 민간전문가를 중심으로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특별위원회의 토론을 거쳐서 2014년 8월에는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인문정신문화 진흥을 위한 7대 중점과제”를 발표했다.  이 중점과제의 세 번째 항목은 “인문분야 학문후속세대 육성 및 학술역량 제고”인데, 그 안에는 인문학 평가제도와 관련하여 상당히 의미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인문학 분야 저술-논문에 대한 균형있는 연구문화 정착
-인문사회 분야 개인 연구지원사업에서 연구자가 다양한 연구결과물 유형* 중 자신의 연구형태에 맞춰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 
*저술, 논문, 출판 및 콘텐츠,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
-정부재정시원사업*의 평가 개선을 통해 교원의 업적평가에서 논문뿐만 아니라 저술, 번역 등 다양한 성과를 인정
*인문사회분야 학술지원사업, BK21플러스 사업 등
-저술-출판성과에 대한 출판 유형별* 평가시스템 시범 도입
*(유형 예시) 학술서, 교양서, 학술교양서 등

이 대목 다음에는 “저술업적 인정 개선 및 지원”이라는 항목을 별도의 박스 속에 제시하면서 종전에 논문 2편으로 환산되던 저술실적을 논문 3편으로 개선하겠다는 당장(2014년) 시행하겠다고 친절하게 밝히고 있다.  인문학에 지원하는 연구비 규모를 늘리겠다는 것, 연구논문만 아니라 저술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연구성과로 인정하겠다는 것, (단행본) 저술의 환산점수를 논문 2편에서 3편으로 늘리겠다는 것은 대학의 인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조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의도가 현장의 인문학 교수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이러한 조치가 각 대학의 교원평가제도에 적용되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정부가 앞장서서 인문학 연구를 생산력과 무한경쟁의 담론에서 완전히 제외시켜야 한다. 대학의 인문학을 4대 세계대학평가로부터 시작되는 평가의 네트워크에 그대로 남겨놓는 한, 각 대학의 교원평가제도가 그것을 반영할 리가 없고, 전체적으로 경쟁체제가 살아있는 한, 인문학에 아무리 연구비를 많이 지원한다고 해도, 그리고 저술을 아무리 여러 편의 논문으로 환산해 준다고 해도, 결국 더 많은 연구비는 더 많은 실적을 요구할 뿐, “인문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일은 만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더 많은 돈과 더 심한 경쟁에서가 아니라 시간적 여유와 깊은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돈을 늘리는 대신 경쟁을 없애는 것, 그것이 “상상력을 발현”시킬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문학을 진흥하겠다는 이 야심찬 정책선언의 어디를 읽어봐도 인문학을 사시사철 진행되는 이 거대한 학문적 올림픽에서 열외 시켜주겠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이 끝이 없는 경주에서 이탈하겠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경주를 하되, 인문학에 적합한 경주를 하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한국의 인문학은 일차적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해야 하고, 한국의 연구생태계 혹은 한국어로 된 지적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자의 경주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좋은 규칙 아래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인문학 평가의 개선방향- 독자성, 다양성, 지역성

인문학을 학문적 올림픽에서 열외로 해야 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생산성 경쟁을 지양하자는 것이지 무조건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인문학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토론이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따라서 인문학 연구평가기준도 일정한 제도적 합리성을 갖는 방식으로 달리 정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평가 전문가들이 제대로 된 연구를 해보지도 않고, 인문학 연구의 성과는 개념화하거나 표준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자연과학의 평가방식을 조금  변형하여 제시하는 데 머물러 왔던 것이다.  인문학의 연구성과를 개념화하는 것도 어렵고, 개념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량화하기는 더욱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인문학 평가에 대한 적절한 대안은 어느 한 사람의 머리에서 단박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전히 “분노하는” 인문학자의 한 사람일 뿐, 대안적 제도를 완성형으로 제시할 수 있는 학문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한국 인문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대안적 평가제도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인문학 본연의 특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독자성

인문학자들이 현재의 제도에 문제제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인문학의 정상적인 연구를 방해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고지 120매 내외의 국내논문이나 A&CI나 Scopus에 등재된 외국학술지에 국제논문의 형태로 가능한 한 빨리, 많이 출판하라는 것이 현재 평가제도가 인문학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면, 적어도 인문학에 관한 한 그 메시지는 틀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연구성과는 학술지논문 보다는 호흡이 긴 글이 더 적합하고, 인문학의 특성상 세계의 독자보다는 국내의 독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출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빨리, 많이” 출판하라는 것은 기업에 적합한 생산성 논리일 뿐 인문학에는 어울리지 않은 요구라는 것이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하는 이러한 입장을 그동안 평가를 담당한 교육부나 연구재단은 철저히 묵살해왔다. 인문학자들은 경쟁을 맹신하는 생산성 담론과 제도적 합리성을 가장한 규범적 폭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연구여건을 규정하는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인문학 평가는 무엇보다 인문학의 독자성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체계, 즉 인문학자의 내부의견과 인문학의 내재적 특성을 반영한 평가지표를 가져야 한다. 
사실, 그동안 교육부나 연구재단은 평가지표를 정하면서 인문학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은 적이 없었다. 인문학 평가에 대한 연구도 대부분 교육학이나 사회학, 문헌정보학 등 사회과학연구자들이 진행했을 뿐 인문학자 내부의 의견은 소위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된 적조차 없었다. 앞서 인용한 박남기 교수의 조사가 그나마 현장의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유일한 조사인데, 다른 영역에 비해 인문사회 영역의 교수들이 “학문영역별, 전공별 차이의 반영을 강화한 질적 평가”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상식을 확인해주는 정도였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서지통계학(Bibliometrics)의 전문가들이 꽤 오래 전부터 인문학적 특성을 보다 정교하게 반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입수 가능한 서지학적 자료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면 인문학 연구의 “질”을 상당부분 계량화할 수 있고, 이를 기본적인 자료로 삼아 인문학자들의 작업의 “가치”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인문학적 연구의 가치는 오로지 충분한 시간동안 관련 학계의 검증을 통해서만 천천히 확립될 수 있다는 인문학자들의 통상적인 믿음과 상반되는 것이긴 하지만, 인문학의 내재적 특성을 어떻게든 반영해 보겠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는 발전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가령, 인문학자 자신들 스스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평가지표가 무엇인지를 체계적인 조사방법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최근의 시도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문학 평가에서 인문학의 독자성을 살리는 일은 평가지표를 개정하는 것 이외에도 피평가자의 선택의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도 확보할 수 있다. 박남기 교수나 김동노 교수의 제안대로 피평가자가 스스로의 평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자신이 선택한 트랙에 따라 특화된 평가방식을 따라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연구자의 자율성을 신장하고 평가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양성

인문학 연구의 객관적 평가가 어렵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연구주제나 방법론, 연구기간, 연구결과물의 형태 등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문학의 내재적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평가의 필요성을 들어 일률적인 규범을 강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령, 인문학 연구는 시급한 현실의 필요성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연구의 주제는 연구자의 호기심과 학문적 관심사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 연구방법도 원전연구부터 이론의 적용, 발굴과 해석, 탐문조사와 통계, 번역과 주해 등 매우 다양하다. 또 그 연구의 결과로 도출된 결론의 “독창성”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독창성”이 가지는 가치가 객관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실적평가가 현실적으로 요구하는 계측가능성, 표준성, 일관성, 형평성 등 평가제도의 불가피한 규범성은 인문학의 이러한 내재적 다양성과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평가제도는 인문학 연구에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다. 인문학을 위해서 평가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평가를 위해 인문학을 희생할 것인가?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면 그 답은 자명하다. 앞서 필자가 인문학을 한국의 연구생태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경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인문학도 현실의 제도에 속해 있는 한 일정한 사회적 책무성(accountability)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책무성을 묻는 방식에 있어서도 인문학의 경우는 평가의 규범성보다는 인문학의 다양성을 절대적 우위에 두어야 한다. 평가의 객관성과 형평성과 실효성 같은 평가의 신뢰도 보다는 인문학 연구의 온전한 완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일정한 연구용역계약에 따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형태로 완성해서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적절한 시간이 경과와 더불어 완성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일정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독자적인 학문적 실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연구비를 통한 인문학 지원은 오로지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만 그 해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인문학 평가는 수량화와 수학적 정합성을 전제하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고, 인문학을 위한 평가의 언어 자체가 과학보다는 인문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처럼 “셀 수 있는 것이라고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니며, 중요한 모든 것을 다 셀 수 있는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지역성

인문학은 보편적인 기초학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한 목적성을 띤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의 인문학이 도시국가를 이끌고 갈 지도자적 시민을 양성하는 목적을 가졌었다면 중세의 인문학은 교회의 종료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했다. 근대대학을 만든 훔볼트의 인문학은 나폴레옹의 점령으로 망해가던 프러시아를 되살릴 수 있는 엘리뜨 인재의 양성을 당면과제로 삼았고, 현대 미국의 인문학은 국민들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를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인문학은 언제나 한 사회의 이상적 인간형과 관계가 있고, 이러한 그러한 인간형을 양성하여 사회에 공급함으로써 사회적 통합과 국가적 발전을 도모한다. 그리고 인문학이 목표로 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인문학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한국의 인문학도 당연히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건전한 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 평가는 이러한 기본적 목적에 비추어 그 성과를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한국 고등교육의 국제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모든 연구영역에서 그 연구활동이 국제적 기준과 수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는 암암리에 그러한 국제적 기준과 수준이 매우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에서는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사정이 다르다. 한국의 인문학적 연구성과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한국의 연구자들이 활동하는 한국적 연구생태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 인문학에서 어떤 연구가 갖는 가치는 그것이 한국의 연구생태계 안에서 위에서 언급한 인문학의 사회적 임무에 얼마나 충실하게 기여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연구의 “질”을 평가하는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상정하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적어도 인문학의 경우에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문학 평가에서 그 성과물을 되도록 영어로 써서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도록 권장한다든지, 국제학술지에 대한 평가조차도 A&HCI나 Scopus같은 외국의 상업적 기관이 발행하는 학술지목록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인문학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관료주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적 성과물이라고 해서 언제나 한국에 관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물론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교양의 일부로 받아들여 자아를 성장시키거나 축적된 학문적 유산으로 받아들여 자기 연구의 일부로 삼는 것은 영어권의 대중들이 아니라 한국의 대중들과 한국의 연구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인문학자들에게 무조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짧은” 시간에 “많이” 낼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국 인문학의 존재의의에 비추어 그에 걸맞는 연구, 한국의 연구생태계를 더 풍요롭고 활기차게 만들 연구를 요구해야 옳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기존의 제도를 아무리 적극적으로 개선해도 그것만으로는 인문학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결코 확보할 수 없다. 

Abstract

Chan Kil Park(Ewha Womans University)

Evaluation in the Humanities: a Humanist Perspective

The recent development in the university evaluation system in Korea has turned out to be extremely detrimental to the university academic research, particularly in the humanities. The corporatization of higher education in Korea imposes a problematic evaluation system on the humanist scholars in that it places them under enormous pressure to publish with the productivity that is not compatible with the humanities scholarship. This paper critically examines the validity of the existing university evaluation system in the humanities from a humanist scholar's viewpoint.  With an analysis of the official statistics on the humanities scholarship of the Korean universities between 2011-2012, this paper argues that the existing publication requirements for the humanities professors are far too much, well beyond their natural research capacity. It is highly unlikely, however, to rectify such a problem without exempting the humanities scholarship from the race of unlimited competition taking place in the global market of higher education that expresses itself in the world university ranking. The research performance in the humanities should be assessed with a new evaluation system formulated with a good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he humanities scholarship such as distinctiveness, diversity, and locality.

Keywords: the humanities, university evaluation, research assessment, world university ranking.

박찬길(朴贊吉), Park Chan Kil
소속: 이화여대(Ewha Womans University)

 

 

 

 

   Related Keyword : 인문학 대학평가 경쟁
 

 

 
 
© 2014 ARMYTAGE.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