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네트워크사회와 인문학

박찬길(이화여대)

정의

네트워크사회라는 말은 1991년 얀 반딕(Jan van Dijk)이 그의 저서 제목으로 사용한 이래 여러 사람들이 사용해왔다. “네트워크사회”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낸 마누엘 카스텔즈(Manuel Castells)도 정보통신기술이 전면화되어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며, 네트워크사회를 정보사회의 더 진전된 형태로 이해한다. 베리 웰만(Barry Wellman)은 개인이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 네트워크 경향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사회현상을 “개인화된 네트워크(individual networks)” 또는 “네트워크 개인주의(networked individualism)”으로 묘사한다. 전문가들이 이 변화된 사회를 어떻게 명명하든, 그들이 뜻하는 바는 네트워크, 즉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연락망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2011년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이러한 주장을 실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10월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박원순씨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선거를 치르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돈과 조직”이 없었음은 물론, 시작할 때의 지지율이란 불과 5%에 불과했던 후보가 야당 후보를 가볍게 뛰어넘고, 급기야 여당의 경쟁자마저 멀찌감치 따돌리고 당선되었던 건, 많은 부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 (Social Network Service)의 대중적 파급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거기에 5%의 지지율을 단박에 50% 지지율로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우리나라 정보보안의 선구자인 안철수 씨였다는 것도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인구 4500만의 대한민국에 스마트폰 사용자가 2000만이 넘었다는 최근의 뉴스는 앞으로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인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필자는 1985년에 애플 8비트 컴퓨터를 사용하여 “중앙한글”로 석사논문을 작성했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문학 전공자로서는 꽤 지속적으로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에 관심을 가져왔다. 여기에서는 지난 10년간 6개의 디지털인문학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경험을 가진 “기술친화적”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제시해 보겠다.

변화

어떤 전문가는 이러한 네트워크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란 세대를 “디지털원주민(Digital Natives),” 필자처럼 그 이전에 태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세대를 “디지털이주민(Digital Immigrants)”라고 부른다. 필자와 같은 세대의 인문학자들은 대략 1987-88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에 어떤 다른 경험을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네트워크 사회가 인문학에 가져온 변화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 필자는 1988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도서관의 전자목록이 주었던 문화충격을 잊을 수 없다. 사실 필자 같은 한국의 영문학 전공자에게 가장 문제는 영미권의 책이나 논문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전반만 해도 도서관의 목록은 종이카드로 되어있었고, 영문학 관련 원서나 최신 논문을 국내에서 구해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외국에 여행하거나 유학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서관에서 책과 논문을 찾아 “복사”하는 일이었다. 필자가 1988년에 처음 사용해본 외국대학의 도서관의 전자목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책들은 모두 도서관의 PC단말기에서 모두 검색이 가능했었고, Telnet같은 연결망을 통해 다른 대학 도서관의 목록까지도 검색이 가능했다. 지금은 모두 당연지사이지만 그 당시 필자에게 그 도서관은 “멋진 신세계”였고, 원자료에 대한 그러한 접근성은 유학의 효용과 보람 그 자체였다.

 

23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자료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모든 중요한 신간들은 아마존(Amazon)을 통해 쉽게 직접 주문할 수 있고, 논문들은 전자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 목록에서 직접 검색하여 바로 출력할 수 있게 되었다. 전자텍스트와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아카이빙(Archiving)이 일반화되면서 이제 웬만한 작가의 원문은 연구자의 PC에서 곧바로 불러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특별허가를 받아 볼 수 있었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동판화 원본들 수십 종을 “블레이크 문고(The Blake Archive)”라는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누구나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전자화된 자료의 질에는 상당한 편차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한국의 어떠한 영문학자들도 책이나 논문을 구하기 위해 외국에 나가지는 않게 되었다. 거의 모든 자료가 이미 전자화되어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며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즉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관련되는 교육 부문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원자료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이야말로 교육자들이 가진 핵심적 자질이었다. 선생은 자료를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가지고 있고, 학생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선생은 그 자료를 만들어 낸 곳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필자가 학부와 석사과정을 다니면서 많이 했던 일도 도서관이 아니라 지도교수에게 핵심적인 자료를 빌어서 복사를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자료의 선행적 경험자이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그것은 선생으로서의 권위의 핵심이었고,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 네트워크상에 올라와 있는 원자료들은 선생에게만 접근가능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강의실에서 어떤 사실에 관한 최종적 권위는 선생이 아니라 학생들의 모바일 기기 속의 구글(google) 검색결과다. 선생들은 더 이상 자료에 대한 선행적 경험이나 접근권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권위에 기대어 교육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선생들은 한 단계 높게 설계된 교단에서 내려와 학생들과 동등한 높이에서 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협

인문학은 언제나 정보유통의 기술에 의해 규정되어왔다. 근대 인문학의 관습과 제도는 기본적으로 구텐베르크시대 이래 보편화된 활자문화의 소산이고 지식의 대중적 확산을 가능하게 한 “인쇄된 책”의 산물이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활자”와 “종이책”의 시대의 종언을 뜻하며, 이는 인문학에게도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인문학의 위기”나 “문학의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수사법을 보면, 이러한 변화는 많은 인문학자들에게 밝은 미래보다는 비극적인 종말을 시사하는, 매우 근본적인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위협인가?

인문학자들은 그 성격상 기술에 밝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빠른 속도로 보급되는 디지털 기술도구들, 가령 실시간 연락이 가능한 이메일과 메신저, 정보의 양이나 전달의 효율성면에서 칠판과 비교할 수 없는 사이버캠퍼스와 전자강의실 같은 새로운 매체를 연구와 교육에 활용하는 데 유능할 수 없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이 느끼는 이러한 일차적인 불편함은 매우 초보적인 위협에 불과하다. 인문학자들은 이제 좋든 싫든 자신의 학문적 활동의 결과를 네트워크상에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의 효용을 네트워크상에서 두루 인정받기도 해야 한다. 즉 대중들에 의해 수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가치나 인문학적 지식은 대중들에게 쉽게 인정될 만큼 그렇게 실용적이지 않다.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인문학적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단위로 환산되어 표현될 만큼 구체적인 효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우리 삶의 항상적 조건이 되고 있는 네트워크 안에서는 모든 학문적 분야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표준화된 범주에 의해 평가받고 있으며, 그 범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불행하게도 매우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실용적 가치이다. 왜냐하면 네트워크 상의 학문적 활동은 더 이상 교회나 대학이라는 분리된 구획 안에서 특정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 안에서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에게는 매우 불리하게도 이제 사람들은 인문학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직접 묻는 상황이 되었고, 현재까지의 인문학은 그 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 타개한 스티브 잡스(Steve Jobs) 같은 산업계의 영웅이 아이패드(ipad) 같은 창의적 제품생산의 원동력으로 인문학(liberal arts)으로 꼽아준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령 아이패드가 인문학이 길러낸 창의적 사고의 한 결과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한 우연이고, 만일 우리 사회 전체가 진정으로 인문학을 산업생산의 한 요소로 간주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적 육성이 아니라 인문학의 사멸로 귀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적 생산이라는 특정한 목표에 귀속되는 이른바 “창의성”은 인문학적 사유가 가진 자유로움과 근본적으로 상반될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인문학이 느끼는 또 다른 위협은 강화된 경쟁이다. 전통적 인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경쟁은 원천적으로 불공평하고 부당한 경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트워크상에서 통용되는 매우 대중적이고, 물질적이며, 표준적인 가치를 전제로 한 경쟁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경쟁해야 한다. 필자는 최근에 참가한 국제세미나에서 한 이론물리학자가, 이론물리학의 어떤 연구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의 개발에 도움을 준 것처럼 인문학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확실하게 기여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에게 이러한 요구는 원천적으로 부조리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진리탐구의 수단으로서 자연과학과 벌여온 경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뿐더러, 최근 인문학자들의 학문적 실천에 대한 “평가”가 자연과학적 모델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실감하고 있는 바이다. 이것은 인문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당한 대우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몇몇 무지하고 몰지각한 교육관료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사회의 본질적 속성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한다. 네트워크 사회에 참여하는 한, 인문학이 오로지 인문학에게만 고유하게 적용되는 기준에 의해 평가를 받거나 평가 자체를 초월한 지점에서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이제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인문학은 그 학문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네트워크 사회의 속성과 어긋난다. 인문학에서는 고독한 사유가 학문적 실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인문학자도 선학들의 저서나 동료들의 논문을 읽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사유는 철저하게 한 특정한 개인에 속한다. 반면에 네트워크 사회의 기본 속성인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은 어떤 한 개인의 결정적 기여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상호작용을 통한 집단적 지성을 지향한다. 물론 인문학도 큰 맥락에서는 상호작용과 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네트워크상에서는 지식의 생성과정 자체에 상호작용과 협업이 미시적으로 관철되며, 그 속도 또한 거의 동시적이라고 할 만큼 빠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전통적인 인문학이 만들어 낸 브리타니카(Britannica)와 같은 권위 있는 백과사전과 위키피디아(Wikipedia) 같은 “저자없는” 온라인 백과사전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수년 전만 해도 브리타니카의 항목해설과 위키피디아의 항목해설은 그 깊이나 정확성에 있어 비교가 안될 만큼 품질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위키피디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브리타니카의 전문성을 따라잡고 있으며, 두 사전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브리타니카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인문학은 이제 싫든 좋든 고독한 사유 대신 일종의 협동적 사고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로에 놓여있다.

전망

네트워크 사회가 여러 가지 점에서 제도로서의 인문학에 근본적인 위협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인문학자 개인에게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가 꼭 나쁜 소식만은 아닐 수도 있다. 웰만(Wellman)의 “네트워크 개인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네트워크의 탈권위적, 탈중심적 성격은 개인의 창의성을 새롭게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정치에서 몇몇 선구적 개인들이 네트워크상의 새로운 기술도구들을 독창적으로 활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것(예를 들어, 김어준씨가 포드캐스팅[podcasting]을 통해 대중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한 것)을 보면, 네트워크는 개인으로서의 인문학자가 그들의 창의성을 새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일 수도 있다. 인문적 교육의 독점적 공간이었던 대학, 인문적 출판의 독점적 주체였던 출판사, 인문적 연구의 독점적 지원기관이었던 연구재단 등은 네트워크의 탈권위적, 탈지역적 성격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학자 개인의 인문학적 활동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 사회는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개인의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인문학이 네트워크 사회에서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에 맞지 않은 자연과학적 진리관이나 방법론을 인문학에 덧씌우기 보다는 인문학자 개인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네트워크 사회의 속성에 맞게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문학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발전시키기 보다는,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며, 인문학자로 하여금 디지털 네트워크상의 기술적 도구들을 더 자유자재로 사용함으로써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지식을 자유롭게 습득하고 유통시킬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요컨대, 네트워크상에서 계몽된 개인들과 훨씬 더 역동적으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창의적 개인으로서의 인문학자들을 길러낼 수 있다면, 네트워크 사회와 건설적으로 공존하는 인문학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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