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좋은 번역을 위하여

 

박찬길(이화여대 영문과)

 

 

 

번역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나는 영국시를 전공한 문학교수일 뿐, 번역에 관한 경험이나 식견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교육적 목적으로 시 본문을 우리말로 번역할 것을 요구하여 학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번역행위의 본질에 대해 학문적으로 깊이 탐구해본 적은 없다. 그리하여 내가 관여하고 있는 학회인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최근에 진행했던 “번역평가사업”을 소개하고 그 핵심관계자들을 필자로 추천했다. 사실상 나는 그 연구회의 창립멤버이면서도 그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진행방식에 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등장한 “번역학”의 논의에 대해서도 얼마간 의도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그들이 거론하는 “번역이론”의 실제적 효용도 미안하지만 매우 인색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좋은 번역은 “이론”이나 “평가”가 아니라 재능과 전문성을 가진 좋은 번역자의 정성과 노력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번역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론이나 평가가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번역을 할 만한 사람들이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 설명에 청탁한 분은 문학전공자의 입장에서 바로 그러한 취지로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다시 요청을 하였다. 이에 번역에 대한 나의 일천한 경험과 소박한 소신을 바탕으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번역, 무엇이 문제인가?

 

영미문학 연구자들의 모임인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가 번역평가사업을 추진하게 된 계기와 그 결과, 그 후속논의들은 번역평가의 결과물인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1, 2권과 영미연 학회지『안과밖』의 번역관련 특집논문들을 통해 상세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여기에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내가 알기로 영미연이 번역평가사업에 착수하게 된 것은 대부분 영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가지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문학연구자로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들에 대해 느끼는 울분에 가까운 불만, 그리고 그와 관련된 직업적 책임감 때문이었다. 각각의 연구자들은 대개 교육적 목적으로 자기 분야의 작품의 국역본을 접하게 되는데, 원본에 대한 일정한 식견을 가지고 번역본을 검토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좋은 번역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번역출판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과 윤리를 지키지 않고 만들어진 번역본들이 아무런 통제없이 시장에 유통되어왔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평가사업의 대상이 된 것은 영미문학의 고전 71개의 판본 899종 중 49.5%인 445종이 이미 나온 번역본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다시 포장하여 출판한 표절본으로 판명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 번역출판 시장의 참담한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김영희 43). 영미연의 번역평가는 일단 이러한 가짜 번역본을 골라낸 다음, 남은 “진짜” 번역본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나은 번역본을 가려내는 것이 목표였다. 유통되는 번역본들 중 엉터리가 많다는 것은 관련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모두 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것들에 관해 공개적으로 “별점”을 매긴다는 사실에 대해 출판관계자들이나 번역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모두들 현재 번역출판의 현실이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령, 번역이라는 것이 매우 창의적인 작업이어서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든지, 아니면 소위 전공학자들이라고 해서 번역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은 아니라든지, 혹은 평가팀이 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한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이 평가의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내용의 문제제기가 있었고(정영목, 조성원, 이형진), 이에 대한 영미연 평가팀 쪽의 반론(오길영, 김영희)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 입장에 서든지 간에 이번 영미연의 번역평가사업이 최초로 공론의 장에서 우리나라 번역출판 시장의 문제점을 통계적으로 밝히고 좋은 번역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의의가 상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활발해진 번역학에 관한 논의나 “번역비평”에 관한 관심 역시 이러한 평가사업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번역의 수준을 실질적으로 높이기 위해 더 긴요한 것은 번역 자체에 관한 이론적 논의보다는 그동안 그러한 수준의 번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고 본다. 고전적인 문학작품이나 학술서등의 경우 좋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는(혹은 드물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외국어능력을 두루 갖춘 번역인력이 없거나, 그들의 번역기술 혹은 번역이론이 부족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번역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 기준 29%나 됨에도 불구하고(한기호 12) 전반적으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고, 따라서 번역물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 매우 적다. 또 그에 따라 번역자들의 사회적 위상이나 직업적 자긍심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의 경제학

 

시인 김수영은 상고출신임에도 영어를 잘했고, 통역과 번역, 영어선생 노릇은 가난한 시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었다. 평화신문의 문화부 차장으로 주로 영어 번역 일을 하던 1954년 12월 30일에 쓴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제일 불순한 시간이어야 한다. 몸과 머리가 죽은 사람 모양으로 기운이 없어지고 생각이 죽은 기계같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시작하여야 한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서 제일 욕된 시간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렇게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 하루에 서른 장(이백자 원고지)을 옮기면 잘 하는 폭이다. 그것도 날이나 추워지고 하면 더 하기가 싫다.

 

김수영에게 번역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달갑지 않은 정신적 노동이었다. 그에서 시쓰기는 삶 그 자체였지만, 번역일은 치욕적인 생계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시인들에게 고전시의 영어번역이 습작의 중요한 과정이었던 것에 반해, 김수영의 작품목록에는 단 한편의 번역도 들어있지 않다. 5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나의 경험으로도 영문과에 진학하는 상당수 학생들이 장래 희망을 통역사 혹은 (전문)번역가라고 밝히기도 하고, 안정효나 이윤기 같이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번역가들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번역과 관련된 상황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번역출판의 규모와 비중이 이전에 비해 커진 만큼 번역료의 수준도 김수영시대 보다 훨씬 나아졌겠지만, 대다수 번역가의 경우 여전히 출판사가 요구하는 “팔리는” 작품을 정해진 시간 내에 신속하게 해내야 하고, 그에 대한 보수는 여전히 놀랄 정도로 열악하다(한기호 29). 아무리 자격과 실력을 갖춘 번역가라 하더라도 번역출판시장의 경제적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좋은 번역을 만들어내기 어렵다(김선형 2004, 78-79). 영미연의 번역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조건에서 번역되었고, 설사 번역자가 해당분야에 대해 고도의 지식을 가진 전문연구자라 하더라도 크게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이다. 사실상 고전적인 문학작품이나 전문적 학술서의 경우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출판시장에 맡겨져 번역되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전체의 검토대상에서 10%에 해당하는 번역본이 추천번역본으로 가려질 만큼(김영희 39) 좋은 번역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매우 고무적인 결과이고 그것은 순전히 그 번역자들의 특별한 자질과 헌신의 덕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번역행위 자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으며, 번역학적 연구나 번역이론보다는 번역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한 형편이다. 상업적 출판시장에서 좋은 번역을 더 많이 얻고 싶은가? 간단하다. 번역료를 지금의 세 배로 올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더 좋은 인력이 번역을 하고자 할 것이며, 번역 일의 사회적 위상도, 변역자의 자긍심도 올라갈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에게 직업적 자긍심이 있다면, 그것은 연봉이 높기 때문이지 증권거래라는 일의 본질이 번역의 그것보다 더 창조적이거나 고상해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독자들이 갑자기 책값을 세 배로 지불하지 않는 한 출판사들이 먼저 그렇게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일정한 분야에서라도 높은 수준의 번역품질을 확보하는 방법은 번역지원, 번역보조금 등 공공의 자금을 통한 비상업적 번역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과 대산문화재단에서는 학술서적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정책을 시행해 왔다. 상업성은 없으면서 학술적 가치가 큰 서양의 고전의 목록을 미리 선정하여 전문가들을 통해 번역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비상업적 번역은 번역출판계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의 규모와 속도에 비하면 극히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번역지원사업, 제대로 되고 있나?

 

한국연구재단의 동서양명저 번역사업 요강을 보면 그 대상이 기본적으로 해당분야의 대학교수들이다. 당연한 일이다. 대학교수들이야말로 해당분야의 공인된 전문가들이고, 외국어로 된 해당분야의 가치있는 저서들을 번역해내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의무에 속한다. 또 순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러한 프로젝트의 지원조건은 상업적 번역에 비해 나쁘지 않다. 전문번역가와는 달리 대학교수들에게는 이 일이 “부업”임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번역지원사업에 대한 교수들의 열성과 참여도는 낮은 편이다. 경쟁이 화두가 된 현재의 대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구업적”의 점수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 학술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문헌이라도, 아무리 분량이 많아도, 번역서 단행본은 원고지 100매 남짓의 연구논문 두 편의 점수를 넘을 수 없다. “부업”의 측면에서 봐도 시간과 정성을 무한대로 요구하는 번역을 하기보다는 단촐하게 연구논문 한 편을 쓰면 되는 일반연구비에 지원하는 것이 훨씬 수지맞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교수들이 전공분야의 주요작품들을 성심을 다해 번역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경우에도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번역을 중요한 연구업적으로 인정하고 교수들이 그것을 “본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지원액을 늘리기 보다는 더 많은 점수의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으로 본다. 이 번역지원제도가 통상적인 연구를 위축시키는 방편이 되지 않으려면 번역의 품질과 난이도, 학술적 공헌 등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특히 대학사회에서 정착되어야 한다. 번역을 지원하는 기관에서도 번역서를 한두 편의 논문의 점수로 묶어놓는 이유는 번역의 중요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교수들에게 의뢰하여 시행하는 학술적 업적에 대한 “질적 평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수들 스스로도 다른 교수들의 평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엉터리 번역”으로 연구업적을 때우려고 하는 교수들의 “도덕적 해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좋은 번역이 이루어지려면?

 

고도의 학술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학술서 번역이든, 높은 문학적 식견이 필요로 되는 문학번역이든, 아니면 일반대중을 위한 교양서적이든 좋은 번역은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번역자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직업적 사명감으로 작업했을 때, 그리고 그 번역물에 대해서 적절한 “보상”이 뒤따랐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러자면 상업적 번역출판계에서는 번역료의 수준이 파격적으로 올라야 하고, 또 번역물을 읽는 일반독자들 역시 더 나은 품질의 번역물을 위해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좋은 번역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상업적 학술번역의 경우는 번역 자체를 심각한 연구로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번역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번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1641년부터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난학”(蘭學)이라고 했다. 이러한 “난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수입된 서양문헌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번역가들이었고, 이들을 “통사”(通士)라고 불렀다. 국가는 체계적으로 “통사”를 양성했고, 메이지유신 이후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했으며, 이들의 활동했던 기관들이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동경대학이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의 번역가들은 일본의 근대적 학문의 핵심주도세력이었고 번역은 일본 근대학문의 주춧돌이었다. 우리나라도 유길준을 비롯하여 근대화시기에 서양문물에 정통했던 지식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이들이 독자적인 근대화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앞서 인용한 김수영의 번역가로서의 참담한 자기인식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영문학이라는 “서양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내가 한국의 독자를 상대로 한국인으로서 학술활동을 하는 한 전공분야의 모든 학문적 탐구가 결국 넓은 의미의 “번역”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나뿐 아니라 “서양학”과 직간접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인문사회분야의 연구자들은 “통사”로서의 자기인식과 그 사회적 책무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가령 윌리엄 워즈워스를 연구하는 나에게 있어 그의 평생의 역작인 『서곡』(The Prelude)을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하는 일이 쓰임새를 알기 어려운 전공연구논문의 작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번역은 나의 연구생활에 있어 “부업”이 아니라 “본업”이어야 옳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져야만 우리 사회에서 번역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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