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정보시대의 인문학, 그 위기와 가능성 - 신입생들에게

 

정보시대는 이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말이 되었다. 정보사회, IT산업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매일 같이 TV뉴스에 흘러나온다. 삼성이나 LG같은 회사가 반도체 하나만으로 우리 수출의 약 10%를 기여한다고 하고, 반도체가격의 폭락은 곧바로 우리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휴대전화 사용율과 초고속인터넷의 보급률은 단연 우리나라가 세계최고이며 그런 면에서 요즈음의 우리 사회는 빠른 정보화의 모범사례를 전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고도 한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분명히 가능성과 희망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과 불확실성이기도 하다.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고, 그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생활의 변화가 너무 급격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인문학을 하는 백면서생들은 우리의 삶을 실제로 지배하는 힘, 즉 정보기술과 그것을 소유한 거대자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고, 때로는 초조해지기도 한다.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고 하는 최근의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불안감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왔다. 인문학이란 사람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성찰하는 학문이며,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회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식인이라고 자부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작금에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그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이 어찌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불쾌하기로는 현재 인문학부에 소속된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전에는 문리대, 혹은 인문대가 최고의 지식 공동체였고, 그런 만큼 뿌듯한 자부심을 주었지만, 지금은 인문대 학생이라는 것이 오히려 일종의 무력감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인문대는 한마디로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졸업할 때가 가까워지면 영어연수다 컴퓨터 학원이다 하면서 긴장과 초조감속에 허둥댄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뭘 그리 서두르냐고 물으면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기술이 없잖아요?” 변변한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병사가 가질법한 그런 낭패감에 휩싸인 제자에게 그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의 능력이라고 아무리 설교를 해봐야 별로 위로가 되는 것 같지 않다.

핸드폰과 인터넷, 위성방송과 3차원영상이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에서 인문학의 위상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제 싫든 좋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학문은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이라며 바깥 세상의 세속적인 관심을 경멸하면서 버틸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실 서구에서 르네쌍스와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래 인문학이 누리던 학문적 위세는 계속해서 위협받아왔으며, 정보사회의 인문학이 경험하는 위기는 알고 보면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상의 변화가 인문학의 “무용성”이나 인문학적 탐구의 “비실용성”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삶에 가져온 여러 가지 변화가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과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긴 했지만, 탐구 그 자체의 효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기술”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인문학적 사유”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는 인간적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기술”이다. 정보사회에서 우리의 삶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변화의 인간적 의미를 제대로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인문학밖에 없고, 이처럼 어지러울 만큼 변화무쌍한 기술진보의 시대에 그렇게 중심을 잡아주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에 새로이 부여된 사회적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인문학자의 자기방어적인 항변이 결코 아니다. 인문학 종사자들이 막연한 열등감에 빠져있는 동안 인문학의 적극적 의의를 발견하고 주장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오히려 공학 쪽의 전문가들이다. 그들에게는 기술자체에 대한 신비감이나 두려움, 피해의식이 없다. 기술은 그냥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보기술은 크게 정보를 축적하는 기술, 그리고 그것을 주고받는 기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정보를 아무리 많이 축적하고, 아무리 빨리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어도 도대체 축적하거나 주고 받을 정보 자체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정보의 양과 질을 보장해주는 것이 크게 보아 인문적 사유이고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인문학이 자기 할 일을 더 착실하게, 더 큰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해나가야 한다는 것은 단지 인문학 스스로의 다짐이 아니라 인문학 외부에서도 공감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인문학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똑같이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인문적 지식인이 그 전통적인 탐구만 가지고도 삶에 관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진실을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다는 식의 신화를 그대로 이어가기는 이제는 아무래도 좀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이제는 인문학도 “삶에 봉사하는” 자세를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한다. 인문학은 책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시대착오적 발상으로는 새로운 사회에서 쓸모 있는 학문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복사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대에 더 치열하고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했었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상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터넷은 깊이 있는 사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안방에서도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세계와 더불어 사유할 수 있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대학 1학년 시절에 한 철학교수로부터 들었던 감동적인 한 마디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대들은 지금 거대한 사상의 바다 앞에 서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도 거대한 사상의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훨씬 더 먼 바다로 훨씬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는 쾌속정을 타고 있다는 점이 그때의 나와 다를 뿐이다. 쾌속정을 타고 누비는 사상의 바다는 틀림없이 훨씬 더 근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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