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ytage Open Lecture
 

*2018년 9월 29일에 무척 아꼈던 후배 김재오가 갑자기 별세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가 죽고난 다음에야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절절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아래의 글은 그가 운명한지 5주 후에 열린 영미연 학술대회의 기조발제문이다. 영미연 운영위에서 나에게 추모의 말을 첨가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는데, 나는 학술대회의 주제에 맞춰 그의 글 네 편을 간단하게 리뷰했다.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예루살렘과 낭만주의적 유토피아: 김재오를 추모하며
박찬길(이화여대)

유토피아는 늘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천년왕국의 도래를 약속했던 기독교가 하나의 역사적 전망으로서 그 권위를 상실한 후, 서구의 근대는 종교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함으로써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8세기말의 프랑스혁명은 구체제의 혁파를 통해 자유, 평등, 박애가 실현되는 정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습니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정복, 정치적 혁명을 통한 공화국의 완성만큼이나 절실했던 여성해방의 꿈이 일깨워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지요. 이처럼 서구사회의 근대성은 과학혁명, 정치혁명, 그리고 성혁명이 그들의 역사의 공간에 전개되면서 확립되었고, 그 바탕에는 언제나 현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넘어선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근대문학은 바로 그러한 혁명의 꿈에 대한 가장 생생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문학과 관련하여 혁명의 꿈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꿨던 사람들이 바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과학혁명의 결과가 갑자기 현실에 나타나면서 어떤 악몽이 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목격했고, 그 역사적 의미를 가장 선구적으로 통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러한 정치적 혁명이 일시적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인간내면의 근본적 변화가 없이는 그 결실이 얼마나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는지를 바로 곁에서 목격한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학은 혁명의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실패가 가져온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인간의 내면을 성장시키고 완성시킴으로써,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온전한 인간”(The Whole Man)을 키워나가며 그들 나름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유토피아와 관련된 영미문학을 다루면서, 영국낭만주의를 빼놓은 것은 다소 의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전의 영미연 학술대회에서 “낭만주의와 유토피아”라는 주제를 한번 다룬 적이 있어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1998년 가을학술대회에서 블레이크,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셸리(Percy Bysshe Shelley) 전공자들이 그들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발표한 바 있고, 이듬해 상반기에 나온 『안과밖』 6호에는 그 결과물들이 특집논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그러한 속사정을 소상하게 다 알면서도 오늘의 발제에서 낭만주의 문학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좀 특별한 사정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안과밖』  편집장을 맡고 있던 김재오선생이 지난 9월 29일에 갑자기 별세했습니다. 운명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저에게 원고독촉 카톡을 보냈을 정도로, 본인도, 주변의 지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특히 최근에는 더 활기차고 건강했었으니까요. 고인은 특유의 소탈한 성품 때문에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돈독한 친분을 나눴지만, 저와의 인연은 특히 더 각별했습니다. 무엇보다 영국낭만주의를 전공하는 동료연구자였고, 10년 정도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지도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영미연의 창립회원으로서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근대분과에서 활동해왔지만, 김재오선생은 근대분과뿐만 아니라 『안과밖』 초창기에 편집간사로 시작해서 편집위원을 거쳐 최근에는 편집장을 맡을 만큼, 『안과밖』 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이 저 자신에게도, 또 영미연 전체에도 큰 충격이었고, 그 빈 자리를 메우는 데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오선생이 영미연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워낙 컸고, 또 너무나 황망하게 그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고인이 운명한지 정확하게 5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김재오선생 없는 영미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얼마 전 영미연 운영위원회는 학술대회 기조발제를 준비하는 저에게 김재오선생을 추모하는 언급을 부탁했습니다. 사실 이번 기조발제는 매우 형식적으로 잠깐만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저 역시 앞서 언급한 “낭만주의와 유토피아” 『안과밖』 6호 특집에 졸고를 발표했었고, 사실 유토피아에 관해서는 그 이상 더 공부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많은 고민 끝에 김재오선생의 블레이크 논문을 재료로 삼아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참담한 마음으로 고인의 빈소에 다녀오긴 했어도, 그리고 술자리에서 몇몇 선후배들과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긴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인을 제대로 추모할 기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개인적인 추억담이나 의례적인 덕담을 하는 것보다는 학술대회 주제와 관련하여 그의 글을 몇 편 리뷰해보는 것이 블레이크 학자였던 김재오를 김재오답게 추모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재오선생은 지난 2004년에 『윌리엄 블레이크의 묵시록 다시 쓰기: 예루살렘 연구』라는 논문으로 서울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관심은 밀튼(John Milton, 「투사 삼손과 밀튼의 정치사상」)에서 네그리(Antonio Negri, 「네그리의 정치사상과 문학」)까지 실로 그 범위가 넓지만, 주된 학문적 관심사는 낭만주의 시였습니다. 제가 대강 살펴본 것만도 블레이크 4편, 워즈워스 3편, 코울리지 1편, 키이츠 1편, 이렇게 낭만주의시 작품론만 9편이었습니다. 김재오선생은 이 논문들에서 명시적으로 유토피아를 논하지는 않았지만, 블레이크 시의 큰 줄거리가 정치적 억압과 종교적 관습의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었는지 보여주면서, 자신의 예언적 상상력에 의해 시적으로 복원된 “온전한 인간”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의 많은 시 작품들은 이미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적 비전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김재오 선생이 발표한 블레이크 논문 네 편을 잠깐씩 언급하는 것으로 기조발제를 갈음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명색이 낭만주의 전공이면서도 블레이크를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주로 수업용으로 『순수와 경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나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일부를 자주 읽을 뿐이지요. 그중에서도 제가 즐겨 인용하는 대목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의 “기억할 만한 환상”(A Memorable Fancy)(plate 17-25)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악마에게 찾아와 갑자기 똑바로 살라고 훈계하며 지옥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합니다. 천사와 악마는 마굿간과 교회의 지하에 구불구불 난 지하동굴을 통해 마침내 거대한 지하공간에 도착합니다. 이 “끝없는 심연”(the infinite Abyss)에는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The Divine Comedy)의 지옥편(Inferno)에 나오는 것과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의리없는 천사는 악마를 그 자리에 놔두고 자기 혼자 몰래 도망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 장면입니다. 천사가 사라지자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악마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악마 자신은 “끝없는 심연”의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달빛이 비추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하프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연주자가 부르는 노래는 이런 겁니다. “자기 의견을 결코 바꾸지 않는 사람은 고인 물과 같아서, 마음속에 악어를 키운다(the man who never alters his opinion is like standing water, & and breeds reptiles of the mind).” 악마는 곧바로 위로 올라가 천사를 찾아갑니다. 이 천사는 미안해하기는커녕, 깜짝 놀라서 “너 어떻게 도망나왔니?”라고 묻습니다. 악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같이 봤던 모든 것은 모두 너의 형이상학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천사가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천사의 지옥투어를 통해 악마가 깨달은 것은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사고체계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이크에게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는 이른바 “내면의 지옥”(Hell Within)이고, 블레이크는 이것을 그의 유명한 시 「런던」(London)에서 “the mind-forged manacle”(마음이 빚은 족쇄)라고 표현했습니다. 블레이크에게 지옥은 우리가 스스로 내면화한 “형이상학”이고, 그는 후기시에서 이것을 “유리즌”(Urizen)이라는 인물로 형상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블레이크의 유토피아는 마음속에서 “형이상학”의 억압과 압제를 극복함으로써 이룩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조건인 셈입니다.

김재오선생은 「“마음에서 벼린 사슬”: 윌리엄 블레이크 시에서의 자유와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블레이크의 사회비판이 촘촘한 억압의 그물에 포획된 희생자들의 내면 혹은 의식구조(mentality)를 향한다는 점은…인간이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는 한, 그리고 경험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을 얻지 않는 한, 진정한 사회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블레이크가 후기 신화시에서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며 산만한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성의 오류를 탐구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3면).

이 논문에서 김재오선생은 『예루살렘』(Jerusalem)을 분석하면서 여기에 묘사된 정신적 분열과 타락의 이야기를 전도된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로 읽어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루살렘』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정신적 속박과 타락을 각각 “자유의 위기,” “사랑의 변질,” “지성의 상실”로 요약하면서 시인이 이를 통해 당대의 영국사회의 본질을 냉엄하게 심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이 이러한 타락과 억압을 넘어 유토피아로 향하기 위해서는 “선악의 율법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욕망”을 발현하면서도 남의 욕망을 부인하지 않는 “지성”과 “우애”의 발휘가 필요하다는 것이 김재오선생이 『예루살렘』에서 읽어낸 블레이크의 유토피아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당시 영국정부의 민족주의적 전쟁론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낸 또 다른 논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입니다. 김재오선생은 『예루살렘』에 나오는 루바(Luvah)의 수난·고통·죽음이 당대의 나폴레옹 전쟁의 맥락에서 가지는 정치적 울림에 주목합니다. 루바의 얘기는 “기독교적 사랑이 더 이상 사회적 연대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체제 수호 이념으로 변질되는 상황(3면)”을 폭로하는 시적 비유라는 것입니다. 블레이크에 의하면 영국이 이러한 왜곡된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진정한 예루살렘, 즉 유토피아에 도달했을 때, 영국은 비로소 “엘비온의 발현체”(Albion’s Emanation)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1면). 블레이크가 마음속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직접 묘사하는 대목이니만큼 이 인용문을 김재오선생의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위대한 영원에서 모든 특정한 형상들은 그 자신의 고유한 빛을/뿜어내거나 발현한다. 형상은 거룩한 계시이고/ 빛은 그의 옷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예루살렘이고/ 상호 용서의 막사요 예배당이자 남녀의 옷이다./예루살렘은 앨비온의 자식들 사이에선 자유라 불린다.(12면, Jerusalem 3:54, E203)
 
김재오선생은 『예루살렘』보다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천국과 지옥의 결혼』도 매우 창의적으로 읽어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내러티브 찾기」가 그 논문인데, 여기서 김재오선생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의 자리바꿈이나 그 기계적인 결합이라는 해법이 아니라 악마와 천사의 상호관계가 실천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떤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상호간의 대조적인 논리가 창조적으로 대립하는 양상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종잡을 수 없는 줄거리를 가진 이 시의 핵심적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블레이크에 의하면 유토피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른바 천국이라는 유토피아를 규범화하는 추상화 작업 그 자체이며, 그러한 추상화를 거부하는 이 작품의 혼란스러운 전개 자체가 블레이크의 유토피아적 정신의 핵심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사든 악마든 “부단한 자기쇄신”을 통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야 하며(44면), 이러한 메시지가 “블레이크적 신성개념의 역동성”(45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김재오선생의 해석입니다.
 
당시의 영국처럼 타락한 사회에서 이러한 역동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블레이크 자신과 같은 창조적 예술가였습니다. 김재오선생은 또 다른 논문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술가상」에서 『예루살렘』의 로스(Los)를 이러한 엘비온(Albion)을 건설할 수 있는 창조적인 예술가로 읽어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스는 궁극적인 유토피아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적 전초기지로서 “골고누자”(Golgonooza)의 건설을 도모합니다. 이것은 물론 자기 나름으로 억압과 분열을 넘어선 “온전한” 인간정신을 창조하기 위한 시적 작업의 은유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윌리엄 헤일리(William Hayley)와 같은 후원자의 간섭이나 출판사의 상업적인 압력을 넘어서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했던 블레이크 본인의 경험을 반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블레이크는 “상상력이라는 거룩한 기예를 발휘할 육체와 정신의 자유(99면)”를 진정한 예술가의 존재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스는 몸과 마음의 완전한 자유을 통해 “감각의 온전성을 회복하고 “세세한 특정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창조적 생명력”을 발휘하여 “골고누자”를 건설합니다(93-99면). 김재오선생에 의하면 이러한 “골고누자”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예루살렘은 “예술과 학문의 자유 그 자체이자 예술과 학문 활동을 통해 이룩되는 지성의 공동체(100면)”였습니다. 김재오선생이 20년이 넘도록 영미연에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일했던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골고누자”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재오선생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오든(W. H. Auden)의 「예이츠를 추모하며」(In Memory of W.B. Yeats)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김재오선생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을 이것보다 더 잘 표현한 대목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대는 우리처럼 어리석었다. 그대의 재능은 모든 것을 넘어 살아남았다.
부유한 여인들이 사는 마을도, 육체적 쇠퇴도, 
그리고 그대 자신조차도. 미친 아일랜드는 그대를 아프게 시로 밀어 넣었다.
아일랜드는 아직도 미쳤다. 미친 그 날씨도 여전하고.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게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시는
그것이 만들어진 계곡, 관리들은 결코
상관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안에서 살아남는다.
시는 고립과 분주한 슬픔으로 가득 찬 농장들과,
우리가 믿고, 그 안에서 생을 마치는 낙후된 마을들에서
계속 남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시는 살아남는다
일어남의 한 방식으로, 하나의 입으로.

 

 

 

 

   Related Keyword : 김재오 추모발제
 

 

 
 
© 2014 ARMYTAGE.NET ALL RIGHTS RESERVED